‘AD(After Disease)’는 역사를 나누는 새로운 시간표인가?

 

인간의 역사를 시간으로 구분하는 대표적인 기준 중의 하나는 BC(Before Christ, 그리스도 탄생 전)AD(Anno Domini, 주님의 해)이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 새로운 “AD”라는 단어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질병 이후(After Disease)”로서 코로나19(Corona19, Corona Virus Disease 2019, 이하 코로나19”로 통일함)가 역사의 시간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코로나19의 전과 후가 인간의 역사를 나누는 분수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19가 지구촌의 일상(normal)에 미친 충격은 어마어마하다.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미국과 중국 간에 코로나19의 책임을 놓고 새로운 냉전체제로 접어들고 있다. 코로나19 치료제 백신(vaccine)의 개발을 놓고 연구소 간 경쟁이 치열하고 치료제를 개발하는 연구소와 관련된 주가(株價)가 등락을 거듭한다. 심지어 정치계에서는 코로나19의 행정 대응을 놓고 인간의 생명보다도 정치적 당리당략을 더 중히 여기기도 한다. 코로나19는 아시아계 인종차별(color of Covid)”의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가 하면, 환자들이 넘쳐나 불가피하게 선택적 진료를 할 경우, 노인들은 그냥 내버려 둬야 한다는 논리가 나오는 비정한 의료계의 현실도 안타깝다. 재택근무를 통하여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술의 소비와 가정폭력이 늘고 있다는 소식도 마주한다.

마스크를 쓰고(wearing masks)’,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감염자 추적(contact tracing)’, 그리고 격리(isolation)’치료(treatment)’라는 슬로건은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는 코로나19를 차단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다. 이러한 공중보건의 시책은 자연히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 교회의 일상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모이기에 힘쓰기보다는 가능한 한 흩어져야 하고, 예배는 성전이 아닌 가정에서 드리게 되었다. 교회에서 제한적으로 예배드린다고 하여도 마스크를 쓴 서로의 모습들이 낯설기만 하다. 교회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준비해야 하고, 교인들은 공중예배 대신에 가정예배를 드려야 했고, 컴퓨터와 핸드폰 앞에 모여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 했다.

신학생들의 일상도 달라졌다. 우선 비대면 수업으로 교수와 학생, 학생과 학생 간의 소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디지털시대에 온라인 수업의 효용성은 적지 않으나 학교생활을 온라인으로 해야 하는 일상이 낯선 것은 사실이다. 교회의 신앙교육 일부를 책임지고 있는 신학생들이 온라인으로 담당 학생들을 지도해야 하는 것도 버겁기는 마찬가지이다.

코로나19가 바꾸어 놓은 위와 같은 일상에서 과연 신학의 방향은 무엇인가? 코로나19 시기에 지속가능한 신학과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기독교윤리의 관점에서 몇 가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일상으로 여겼던 노멀(normal)’에 대한 반성

 

우리가 당연시 여겼던 일상, 노멀(normal)’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코로나19 이전의 일상이 과연 정상적이었는지 반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코로나19의 진원을 놓고 국제사회는 책임 공방이 치열하고, 우리는 그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기대가 크지만, 코로나19가 발생하기 그 이전에 인간은 어떤 소비문명을 만들어놓았었는지 되짚어야 한다고 본다. 항생제와 가축의 부산물로 키운 가축들이 인간의 밥상에 오르면서 점차 짐승과 인간 간 먹이사슬의 고리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도시화에 의한 무분별한 산림의 황폐는 안식처를 잃은 동물들이 인간거주지로 내려와 방황하게 되었고, 동물과 인간 간 전염병이 발생하였다. 지구온난화로 말미암은 대기오염은 호흡기질병을 유발하고, 여기에다 과도한 소비문명은 인간에게 각종 질병을 유발하였는데, 이러한 약점을 바이러스는 보란 듯이 치고 들어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코로나19는 건강한 지구를 만들어주고 있다. 이동의 제한으로 연료의 소비가 줄어들자 심각한 대기오염은 세계 곳곳에서 사라지고, 잠시나마 청명한 하늘의 일상을 맛보게 하였다. 공장이 멈추자 대기뿐만이 아니라 수질도 개선되었다. 인간의 이동이 멈추자 훼손된 자연이 잠시나마 복원되고, 멸종의 위기에 있었던 동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그동안 인간이 당연시 여겼던 일상의 허구를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신학의 사명은 코로나19 이전의 일상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이 주신 창조세계에 대한 책임을 새롭게 하여야 한다. 따라서 생태신학의 사명이 그 어느 때 보다 더 중요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진원은 인간 문명이 원인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고 인간의 문명을 과신하며 무엇보다도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그릇된 소비 문명을 바로잡지 않는 한, 2, 3의 바이러스의 창궐은 불 보듯이 뻔한 일이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겸허하게 행동하여야 할지, 자연 세계를 어떻게 돌보고 다스려야 할지 우리는 창조신학의 기본으로 돌아가서 영적 통찰을 새롭게 하여야 할 것이다.

 

과학과의 거리좁히기거리두기

 

과학과의 거리 좁히기거리두기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코로나19에 따른 종교집회의 제한은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은 코로나19에 대한 객관적 사실(fact)에 근거하여 대인접촉의 제한을 제시하였다. 일각에서 신앙에 따른 집회는 과학과 별개의 문제임을 강조하는 소리도 있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하는 이성적인 과학의 소리에 묻혀버렸다. 오히려 코로나19 시대에 전통적인 예배를 강조하는 신앙의 소리가 비과학적인, 반문명적인 종교적 아집으로 비쳐지기도 하였다.

포스트 코로나의 사안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미국 CNN(Cable News Network) 방송의 로고(Logo) 중 하나는 사실이 우선이다(Facts First)”이다. 그 내용은 마치 이 시대의 집단이성의 좌표를 설정하여주는 듯 이목을 끈다. “불확실의 시기에 사실은 명확하게 설명하여줍니다. 불안의 시기에 사실은 안식을 줍니다. 오보의 시기에 사실은 바로잡아 줍니다. 분열의 시기에 사실은 묶어 줍니다. 위기의 시기에, 사실은 가장 중요합니다.” 이와 같은 CNN 로고는 방송에서 다루는 뉴스의 투명성에 관한 것이지만 이목을 끄는 부분은 철저하게 사실의 근거가 과학적인 객관성에 있다는 점이다.

과학과의 거리 좁히기는 과학적 이성과 신앙의 적절한 조화를 의미한다. 우리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에게도 이성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데에 충분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성 자체가 진리는 아니지만, 인간이 방종하거나 교만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냉철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본 웨슬리처럼, 우리는 시대의 과학적 발견에 대하여 겸허히 청취하고, 이를 우리의 일상에 적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본다. 웨슬리 자신도 기초의학(Primitive Physic)”이라는 소책자를 출판하여 일상에서 질병을 어떻게 치료할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바 있다. 이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응급처치에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이와 같은 웨슬리의 의학적 관심은 자신이 의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을 어떻게 건강하게 관리하여야 할지 노력한 대목이다. 의학적 발견을 주의 깊게 살핀 웨슬리의 노력이 전적으로 복음을 위하여 이성과 신앙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시대적인 사명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과학과의 거리두기는 과학에 대한 맹신을 접고 과학 자체가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다. 과학은 가설과 실험, 그리고 검증을 통하여 그 결과를 제시할 뿐이다. 과학적 발견은 시간이 지나면서 끊임없이 수정된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의 진리는 우리에게 영원하다. 과학이 신앙을 대체할 수 없다. 과학은 과학이고, 믿음은 믿음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성령의 인도하심과 영생은 기독교의 확고한 진리이다. 따라서 코로나19 시대는 과학과 거리를 좁히는 치열한 이성적인 작업과 함께, 시대적 이성에 맹신하지 말고, 우리에게 영원한 진리가 무엇인지 명심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신앙이 더욱 더 필요한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공공신학

 

코로나19 시대에 우리는 교회의 책임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여야 한다. 신학이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실천과 연관이 되어 공공신학의 강화가 있어야 한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15278월경, 흑사병의 여파로 사망자가 발생하였던 독일의 비텐베르크(Wittenberg)에서 치명적인 역병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는가?(Whether one may flee from a deadly plague?)”라는 서한을 통하여 역병의 시기에 성직자로서 자신의 입장을 진지하게 피력한 바 있다. 루터는 역병이 접촉성 전염병이라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의 위생을 철저하게 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급적 가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도 그는 만일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가겠다고 힘주어 강조하였다. 루터는 전염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염병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나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기꺼이 찾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사명을 잊지 않았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처럼 신학의 공공성은 사회적 책무를 잊지 않고 더욱 앞장서서 사회를 선도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상의 한 가운데 있었듯이, 교회도 세상 한 가운데 있다. 세상의 빛이 세상으로부터 숨겨질 수 없듯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 신학의 공공성은 코로나19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정치는 행정력을, 과학은 의술을 통하여 코로나19와 맞서지만, 교회는 사랑으로 대결한다. 전무후무한 실업률로 가정마다 위기이며, 불투명한 미래는 청년들을 절망으로 내몰고 있다. 온라인 수업으로 자칫 전인적 인성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까 염려하는 교육계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코로나19는 특히 노년층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그 치명률이 다른 층을 앞서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와 신학의 사명은 더욱더 분명하여진다. 불안을 희망으로, 절망을 기대로, 그리고 죽음을 소망으로 극복할 수 있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선포하여야 한다. 이 낮은 곳으로 오셔서 상처를 싸매주시고 고쳐주신 주님의 사랑을 실현하여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미디어 윤리

 

코로나19를 통하여 인간의 미디어 문명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며, 동시에 그 미디어를 잘 활용하여야 한다. 코로나19는 교회로 하여금 미디어 예배의 홍수로 떠밀려가게 하였다. 예배는 단순히 집회가 아니다. 예배의 자리에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임재가 현시되는 신비의 자리이다. 예배의 자리에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회개와 친교가 있다. 믿음의 후손을 길러내는 교육의 자리가 있으며,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선교의 자리가 잉태되는 자리이다. 민족과 세상을 구원하는 복음의 선포와 파송이 있는 자리이다. 찬양과 기도가 넘쳐나며 눈물과 기쁨이 공감되는 자리이다. 문제는 디지털 시대의 온라인 예배에는 그러한 감동과 기쁨이 반감된다는 점이다. 물론 생사가 갈리는 전쟁의 시기에 디지털 예배가 웬 호사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인간이 몸을 통하여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종교 형식은 디지털 예배가 충족할 수 없는 너무나 많은 신앙적 요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디지털은 인간의 오감 중 지나치게 ’, 즉 시각에 의지하게 한다. ‘눈의 과도한 소비는 눈으로부터 보기시작함으로 취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감당하지 못하게 한다. 미디어 시대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미디어 문명에 대한 과도한 노출은 인간의 정상적인 사유를 제한하고, 시각적 욕망을 증폭시킨다. 넘쳐나는 맛집 프로그램은 배가 부름에도 불구하고 온종일 침을 흘리게 한다. 미디어 게임의 한결같은 특징은 전쟁과 연관이 된다. 수많은 온라인 게임 내 캐릭터들과 전쟁을 벌이고 죽이면서 인간의 생명은 그러한 캐릭터 중의 하나로 가볍게 여겨지고, 게이머는 전사(戰士)가 된다. 온라인에서 넘쳐나는 성적 유희물들은 육체적 욕망만 자극하여 인간의 몸을 무차별적으로 도구화하고 착취한다.

코로나19와 같은 질병이 창궐하는 한, 미디어 예배는 당분간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미디어의 해악에도 불구하고, 살펴보면 너무나 유익한 프로그램도 온라인에는 많이 있다. 그러나 종교의 경우 온라인을 매개로 한 형식의 거리좁히기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종교가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신비의 영역은 그 어떤 인공적인 것을 매개로 파악될 수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그 어떤 것도 우상이 된다. 따라서 교회는 더욱 근본적인 것에 충실하여야 한다고 본다. 미디어는 복음을 전달하는 수단에 불과하고, 선포되는 말씀과 찬양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이를 잊으면 온라인 예배는 그 근본 목적을 상실하고 기계적인 장치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말씀의 목적은 영광 받으실 하나님이시며, 찬양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찬미의 제사이다. 따라서 코로나19 시대에 교회와 신학생은 미디어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하여야 한다.

몇 가지 제안하자면, 예배시간 내내 설교하시는 목사님의 얼굴만 미디어 화면에 비추기보다는 화면에 다양한 자연의 색과 만지고 싶은 질감, 그리고 후각의 요소들을 더하여야 한다고 본다. 기본적인 오감인 시각,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을 통한 오감의 조화가 과도하지 않게 적절하게 예배에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미디어적 요소들은 진리를 선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변화를 이끄는 신학

 

기독교가 역사를 바꾸는 변화의 종교(Religion of Change)”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 과언일까? 위기의 시대에 기독교는 새로운 기회를 제시하여야 한다. 실패의 시기에 기독교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여야 한다. 변화가 영적 성찰로 내면에서 시작이 된다면, 그 결과는 공공의 영역에서 실천으로 드러나야 한다. 기독교는 내적인 영성을 위하여 산으로, 사막으로, 그리고 동굴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거기서 나온 후에는 살아계신 주님의 몸을 체화하며, 주님처럼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상처받은 자, 그리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 온 지구가 코로나19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이때에 교회의 사명은 더욱 더 분명하여진다. 그것은 코로나19를 피하여 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으로 코로나19를 퇴치하는 것이다. 코로나19 극복에 관련된 사실(fact)은 과학의 몫이고, 그 과학의 권고대로 위생수칙을 준수하는 것은 교회와 기독교인의 몫이다. 코로나19의 극복과 전인적 치유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거리두기가 있는 곳에 영적 거리좁히기, 감염자 추적이 있는 곳에 자신의 내면을 파헤치는 영성으로, 격리가 있는 곳에 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한다는 믿음으로 전인적 치유가 일어나도록 쓰임 받는 도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코로나19의 시대는 멈춤(pause)’의 시기이고, 우리에게 큰 도전이자 새로운 변화를 준비하는 신학하기의 시간이기도하다. 문명의 홍수에 떠밀려 우리는 정신없이 방황하였던 것은 아닌가? 너무 빨리 조급하게 달리던 우리가 멈추었을 때, 안 보이던 것이 새롭게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멈춤(pause)’의 시기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 먼저 주님을 새롭게 보고, 흐트러진 자신을 다시 세우고, 상처받은 이웃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고, 미래를 새롭게 준비하는 신학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2020.05. 감리교신학대학교 학보사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