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보자>를 제보한다!

 

10여 년 전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조작사태를 다룬 영화 <제보자>가 우리사회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과학과 신념, 거짓과 진실, 그리고 권력에 맞선 양심이 교차되는 순간에 한 제보자는 사회의 언저리로 쫓겨난다. 차디찬 세상의 현실 속에서 그의 양심이 피할 수 있는 녹녹한 삶의 공간은 우리 사회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미디어 세계의 한 PD ‘수첩에 적혀있는 그 글자들이 다시 제 의미를 찾기를 바라는 희망만이 그에게 유일한 구원의 문이었다.

 

침묵의 사회

 

우리는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회에 사는 것일까? 권력을 중시하고 가부장적 질서가 강요되는 사회일수록 침묵은 생존의 수단이 되었다. ‘아래로 계층화된 사회에서 아래의 역할은 위의 명령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미덕이 된다. 그러나 그 미덕이 강요된 경우 대부분, 위는 자기의 거짓을 가리기 위하여 아래에 침묵을 강요하고, 아래는 그 대가로 생존을 선택한다. 미덕이 거짓 가면을 쓴 폭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에 대항할 수 없는 인간은 불안에 휩싸이며 진실을 위하여 사투하게 된다. 거짓은 양심을 할퀴기 시작하며 인간성을 옥죄며 인간의 생명을 허비하기 시작한다. 삶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며 죽음의 공포가 엄습한다. 거짓은 무()이며 따라서 죽음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침묵은 죽음과 같은 것이라면 과장된 것일까? 이때 인간의 양심에 그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제보의 욕구는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 하는 욕구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기 때문이다. 자기 속에 갇힌 또 다른 자아가 양심의 옷을 입고 몸부림치며 자기 주변의 또 다른 양심에 호소하지만 그 양심의 소리에 응답할 이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개인의 양심에 마땅히 응답하여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 물론 자신의 가족을 위시한 그 공동체이다. 공동체의 역할은 사실 그 개인의 소리를 보호하여 주는 것이다. 그 소리가 양치기 소년의 것이 아니라 실제 공동체의 위기를 알리는 파수꾼의 소리라면 더욱 더 우리는 그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 소리는 개인의 양심이자 자유이며 사회를 이끄는 에너지이지만, 우리는 역사 속에서 자기 소리보다는 대중의 눈을 더 의식하고 자기 양심 보다는 다수의 고함에 더 움츠러든다.

 

과학과 신앙

 

과학은 가설과 끊임없는 실험을 통한 사실 검증이라는 체계위에 세워진 합리적인 지식이다. 언뜻 이성적인 과학은 믿음이나 신앙과는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보자>줄기세포의 경우에는 난치병을 치료하여주고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여 준다는 인류의 소망과 연관이 되어있었다. 따라서 과학도 희망의 학문으로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사람의 생명을 위하여 봉사한다는 과학의 숭고한 정신과 그 헌신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를 탄 장애우들과 불치병 환자들의 얼굴에 번져가는 기대에 찬 환한 미소, 그리고 연구실에서 무균가운을 입고 고생하는 연구원들의 숭고해 보이는 모습이 교차되면서 배아줄기세포는 당시 우리에게 신화가 되어버렸다. 거기에 국익을 대변하는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의 연이은 힘 실어주기는 그 신화를 깨어질 수 없는 신앙으로 만들어 주었다. 장애우들, 국민과 과학자 집단, 그리고 정치와 경제, 국가를 한 고리로 묶어준 줄기세포의 끈은 그렇게 하나가 되었었다.

그러나 과학의 검증은 엄격하고 냉혹했다. 처음 진실규명을 향한 <제보자>의 작은 목소리는 맹목적이고 폭력을 휘두르는 거짓된 신화에 묻혀버릴 것 같았지만 어둠이 빛을 삼킬 수는 없었다. 모든 사실이 조작으로 판명되자 진실의 세계로 흩어졌던 것들이 자기 자리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 과학사에 오래 남을 거짓의 역사를 후손에게 부끄러운 유산으로 남겨주게 되었다. 거짓이 거짓으로 돌아가고 상처만 남은 진실이 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중상주의의 허구

 

이렇게 과학이 신화와 신앙이 되려고 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역사 속에서 생명 과학기술과 관련된 생명 개념에 탈도덕화 현상이 나타난 아픈 기억을 전쟁을 통하여 그리고 수많은 인체 실험의 잔인성을 통하여 교훈을 얻었다. 더 큰 문제는 현대의 생명 개념은 그 유기체적인 생명개념을 에너지와 정보의 결합으로 설명하는 공학적인 개념으로 바뀌고 있으며, 심지어 생명에 관한 인간의 윤리적 책임과 의무에 관한 관심이 약하여진 틈을 타서 생명 공학이 고가의 가치 제품 창출로 이어지는 시장 경제의 특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점 또한 부인 할 수 없다. 환우들의 실제 의학적 치료 목적과는 상관없이 생명관련 주식의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고 선진국에서는 소위 부자들이 줄기세포를 통한 치료에 들어가는 비용의 액수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생명 공학 분야의 시장 형성 요인은 시장 메커니즘을 통하여 필요한 생명의 장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과학기술을 절대화 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전통적인 생명관에 있어서는 생명에 관한 한 목적과 수단은 구별해야 한다는 행위 기준이 있었지만 그러나 시장의 특성은 목적과 수단의 구별마저 상대화시키게 된다. 따라서 생명과학계 일각뿐만 아니라 사회 내에 생명공학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퍼져 있다. 생명공학이 벌써 국가 경제에 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인간 생명에 대한 수단화와 배아 실험으로 얻어지는 의학과 제약학, 그리고 생명공학 산물의 경제적 이익과 대부분 관련되어 있다.

일반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생명공학이 위험하다는 개연성으로만 생명 공학을 위시한 과학의 기술을 반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문제는 진보적인 과학 정책 입안자들은 생명 공학 기술 개발로 얻게 될 사회 이익과 위험을 비교하기 보다는, 생명공학 기술이 조금이라도 이익이 된다면 무모하리만한 발전 방향으로 나아가는 시도를 자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류사회에 활력의 요소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과학 기술의 발전 자체보다 인간의 생명을 중시하는 인간의 정신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 생명 과학기술이 우리의 의식과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공론의 장이 충분하지 않으며, 과학자의 연구 윤리 문제나 과학 기술에 대한 합리적 규제 방안에 관해서도 미비한 현실의 문제는 더욱 더 심각하다. 따라서 기독교도 사람의 신체를 위시하여 생명에 개입하는 기술의 안전과 윤리에 관한 지침이나 기준이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는 현 상황 속에서 과학의 역할과 그 윤리적 책임에 대한 공적 책임에 대하여 그 몫을 나누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양심과 그 소리를 담은 제보가 필요한 것이다.

 

제보하라!

 

실제로 있지도 않은 줄기세포를 언젠가는 만들 수 있는 기술적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논문 조작을 했어도 그대로 눈감아 주자는 것은 거짓된 행동이다. 정직한 제보보다 국익이 앞설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국가의 실체는 거짓이 된다. 차라리 국익이 아니라 권력의 이익이라는 말이 더 정직할 것이다. 진실에 있어서 최후의 보루는 개인의 양심이며 자유인 것이다. 이 점에서 크리스천도 제보에서 예외 일 수 없다.

40일간의 금식 후에, 주리신 예수님에게 나타난 마귀는 이 되게 해보라고 주님을 유혹하였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임을 말씀하셨다. 어차피 은 돌이고 은 떡인 것이다. 돌이 떡이 되거나 떡이 돌이 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인 것이다. 마귀는 주님에게 하나님의 사자들이 받아 주실 것이라면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하였지만 주님은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라고 말씀하셨다. 성전 꼭대기에서 단번에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전의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것이 당연한 진리가 아닌가?

진실함은 과정을 생략하지 않는 것이다. 온전한 신앙도, 불같은 믿음도, 그리고 천국도 우리에게는 다 가능성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공허한 망상이 아닌 것은 우리에게는 주님처럼 살아가는 진실 된 과정을 보여주는 이 있기 때문이다.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딱딱하게 굳은 마음이 변하여 남을 위하여 생명력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제자의 삶’,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몸 된 성전의 주인을 기억하며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겸손의 과정이 바로 기독교와 과학의 진실된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제보가 필요하다면 제보하라! 제보하지 않으면 양심을 억압하려는 인간들에 의하여 지배를 당할 것이다. 제보하라! 그러면 최소한 그나마 양심이 있는 인간들에 의하여 사회는 구성될 것이다. 제보는 소영웅주의도 아니며 피해망상도 아니다. 제보는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진실의 틈을 열려는 아우성이며 혀가 잘린 몸에서 나오는 한탄이다. 폭력의 반대는 평화가 아니라 올바른 권력이다. 정의로운 권력을 통하여 양심은 신장될 수 있으며 공동체를 위한 덕은 훈련이 되며 교육의 효과는 나타날 것이다.

<제보자>에서 나타난 줄기세포 논쟁을 통하여 분명한 것은 이제 세계는 마치 세포 덩어리처럼 하나라는 사실이다. 세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세포 간 의사소통과 면역체계를 증대하여 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세포는 사멸한다는 사실이다. 건강한 세포가 있어야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생명공학이나 사회에 있어서, 그리고 교회에서도 건강한 생명, 건강한 세포, 그리고 건강한 제보는 건강한 사회와 건강한 국가, 그리고 건강한 교회를 일구는 초석이 될 수 있다. 바라기는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우리 기독교도 이러한 과학의 논쟁에 깔려있는 일종의 정직성검증을 불구경하듯이 바라보지 말고 우리도 사회를 정화할 수 있는 도덕적 위상을 높이는 일에 앞장서서 기독교의 생명력을 증진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자신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한 자신은 진실만을 말할 수밖에 없다고 종교재판에서 당당하게 외쳤다. 따라서 크리스천의 제보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한 양심의 순종이며 제자도의 삶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 그리고 신앙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크리스천에게 양심의 소리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만일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19:40)”고 말씀하신 주님을 따를 때 우리는 돌처럼 단단하게 굳은 양심을 깨뜨려 소리 질러야 한다. 세례 요한처럼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온전하게 전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