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인간은 어떤 희망을 먹고 사는 정치적 동물인가?

 

수년 전 미국의 한 방송사에서 서바이벌(survival)’이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제작 방영한 바 있다. 상당한 액수의 상금을 걸고서 무인도에 참가자들을 내려놓고 마지막까지 생존하는 사람이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이다. 우선 이 게임의 규칙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 참가자들이 매일 저녁 회의를 통하여 자신들의 생존을 위하여 불필요한 사람들을 투표로 제거하는 것이다. 일종의 치밀한 계산이 필요한 생존 정치가 개입하게 된다. 그 그룹에는 노래하는 시인이 참가자로 있었다. 이 사람은 첫 날부터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위하여 사랑과 희망을 노래하고 시를 읽어주면서 용기를 북돋우어주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필자의 눈에는 이 시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 보였지만, 결과는 바로 첫 날 투표에 의하여 그 음유시인은 탈락하였다. 생존게임에 필요한 것은 정신적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음식을 공급하여 생존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도덕이나 우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선 빵이 필요하다는 삭막한 생존의 논리가 처음부터 개입하였던 것이다.

정치와 종교도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생존을 위하여 다 필요한 체제이다. 정치가 인간이 생존을 위하여 스스로 제도화하고 발전시킨 사회적 체계라면, 기독교는 그 체계 안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선하신 목적이 있다고 본다. 우선 종교와 정치는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된다. 종교는 세상의 문제점을 변화시키려는 거룩한 뜻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해서 내심적인 신앙의 자유 안에서만 그 뜻이 분명하다. 정치는 유토피아를 지향한다. 정치는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물적·인적 자원을 통하여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며, 이를 법의 틀 안에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해서, 이 약속이 실현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우선 유권자의 표를 정치인이 확보한 후에야 그 정치적 이념을 실제로 현실에서나 적용 가능하다.

과거에는 국가의 경제적 위기나 재난이 있을 때, 종종 종교 지도자가 공영방송에 출연하여 대국민 메시지를 전한 바 있다. 그 어떤 종단의 지도자라고 할지라도 전하는 내용은 국민 여러분, 이 어려운 때 용기를 잃지 말고 희망을 가지세요.”였다. 그러면 이어서 경제부총리나 국무총리가 나와서 우리 정부를 믿어 주시면, 꼭 이 국가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겠습니다.”라고 약속하였다. 양쪽의 메시지는 이런 점에서 같다. 즉 종교나 정치나 희망을 이야기한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 이런 재미있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과거에 문제가 많은 정치인들을 선거 때 또 뽑아주는 이유는 저들이 희망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바로 미래에 대한 그 희망과 약속 때문에 비록 속는 한이 있더라도 또 유권자는 표를 던져 주는 것이다.

 

 

종교와 정치 이데올로기의 문제

 

그런데 종교와 정치의 이데올로기는 여기서 첫 번 째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만일 종교 지도자가 국민 여러분 저를 믿어주시면, 제가 여러분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여 드리겠습니다!”라고 호소하면 어떻게 될까? 반대로 정치 지도자가 여러분 지금은 같이 우리가 기도할 때입니다라고 주장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여기에 종교와 정치의 역할과 그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종교란 이 땅에서 해결할 수 없는 고통과 인생의 위기가 있을 때, 신앙을 통하여 좌절을 극복할 수 있는 영적 생명력을 공급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부활의 약속을 통하여 주님이 약속하신 천국의 소망을 잃지 않고, 이 세상에서 끝까지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반면 정치는 국민들이 당하는 각종 고통을 정의로운 정치적 구조와 평등한 사회 경제적 체제를 통하여 행복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그 목표를 잃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는 성경의 예언자처럼, 기독교는 국가와 정치 지도자들의 부도덕성을 고발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정의를 실천하고,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의로운 삶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종교와 정치의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은 종교와 정치의 역할을 혼돈할 때 발생한다. 이데올로기란 법과 정치, 그리고 경제라는 구체적인 현실적 조건 속에서 한 사상적 이념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그 이념을 신뢰할 수 있는지 정당성을 묻는 사상체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종교의 정치적 이데올로기화는 굳이 부정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이데올로기의 위기의 경우이다. 만일 종교가 자신의 목적을 상실하고 세상에서 권력을 지향한다든지, 또는 정치가 헌법에서 명시한 민주와 자유의 나라를, 특히 경제정의를 실천하지 않고 기도뒤로 숨어버린다면,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위기이다.

종교가 정치적 목적을 얼마든지 지향할 수 있다. 단 종교의 내심적인 양심의 소리와 신앙적 자유를 유지하면서, 세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 신앙의 자유가 실현될 수 있도록 사회를 바꾸어 나가면서, 정의로운 실천적인 삶을 사는 경우에 가능하다. 또한 정치가 종교적 이념을 지향할 수 있다. 단 정치적 체제와 정의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소명을 잃지 않고 끝까지 책임을 감당하면서, 국가의 위기 시 종교가 제공하는 영적 쉼이 필요한 경우, 그 안에서 평화를 얻는 것이다. 만일 이 양자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어거스틴(Augustine)이나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소망하였던 두 왕국, 하나님의 나라와 이 땅의 나라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종교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위기로 말미암아 사회와 종교는 각기 심각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권위와 권력의 착각

 

기독교가 정치 문제로 지탄받는 이유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부탁하신 복음의 목표를 정치적 권력과 혼돈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두 번째 문제이다. 권위와 권력은 그 출발점부터 다르다. 기독교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세상을 사랑하셨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으며,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이 구원의 약속을 붙들게 하셨다. 기독교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거룩한 교제를 통하여 유지된다. 비록 교회 공동체가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구원받은 백성들이 모인 모임이지만, 그 유일한 사명은 복음을 통하여 세상 끝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권력에 의하여 구성되지 아니한다. 교회 내 다양한 제도와 직제가 형성되어 있지만, 이 모든 목적은 오로지 복음의 사명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제도와 직제에 의하여 주어진 일종의 종교적인 힘(power)을 권력으로 착각하게 되면, 여기서 거짓된 복음이 만들어지게 된다. 원래 정치적 권력의 목적은 주어진 정치적 힘을 통하여 평등과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다. 한편, 권위는 그러한 사회를 구현하는 지도자에게 부여되는 공동체의 성원들이 지지하는 정신적 정당성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하여 죄인으로부터 용서함 받은 거룩한 공동체를 지향한다. 교회에는 권력이 무용지물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머리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 외 모든 성원들은 서로 섬기며 돕는 지체일 뿐이다. 따라서 교회의 유일한 힘은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 사랑외에는 없다.

권력은 적어도 민주사회에서는 올바른 정치사회 공동체를 위하여 국민들이 국가와 정치인들에게 부여한 (power)’이다. 국민은 국가의 지도자들을 선출하면서 그들에게 정의로운 법과 국민의 안전을 위한 치안 유지를 위한 경찰력’, 그리고 국가의 안보를 위한 군사력의 권한을 위임하였다. 그러므로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권력을 정의롭게 사용하여야 한다. 그러나 정치가 권력을 잡기 위한 정치적 기술만 부리는 정당정치에만 혈안 되고, 선거 때마다 유권자의 기대를 기만하는 공약(空約)으로 점철될 때, 그 국가와 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따라서 교회의 권위와 국가의 권력은 서로 견제와 격려가 필요하다. 교회 공동체가 세상의 성원들이 모여 구성된 신앙의 자유를 구현하는 시민들의 모임이라고 할 때, 교회는 신앙의 자유와 그 목적에 대하여 분명한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아울러 세상 속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갈 때, 어떻게 정의로운 사회가 실현될 수 있는지 그 정치적 사명과 목표에 대하여 분명한 예언자적 관점을 잃지 말아야 한다.

교회의 성원과 지도자가 권위를 유지하려면, 정치적 권력을 넘어서는 숭고한 정신적 세계를 유지하여야 한다. 이는 권력의 욕망이나 권력을 통한 경제적 이익에 좌우되지 아니하는 신앙의 발로에 의한 고상한 믿음을 갖추어야 한다. 법의 논리를 초월하는 양심에 의하여 세상의 약자들 편에 설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이 권위를 잃게 되면, 교회의 기구나 제도는 순간적으로 권력의 힘으로 변질된다. 종교가 권력이 되어버리면 ,그 자리에 계셔야 할 하나님 대신 피조물인 인간이 대신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제도에 의한 억압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통치하시지만, 인간은 그것이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지 권력으로 인간을 지배한다. 따라서 기독교는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부여하신 사랑의 권위로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영적 힘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정치적 면죄부의 문제

 

교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세 번 째 문제는 선거를 통하여 새 정권이 들어설 때 발생한다.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교회의 사랑은 보편적이며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거룩한 뜻이기 때문에, 이 사랑의 이념으로 정의로운 정치를 위한 정신적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기독교의 사랑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영원한 것이지만, 정치적 이념이 구현하는 정의와 평등은 상대적이다. 그리고 정치는 권력을 놓고 펼치는 변화무쌍한 파노라마와 같기 때문에 정치적 잣대의 정의와 평등은 지극히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또한 정치가 그 일부를 감당하여 줄 것을 기대한다. 사도 바울도 이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순복하기를 요구하였다(13장 참조). 어거스틴(Augustine)이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그리고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도 이 세상의 권세와 권력에 대하여 이중적인 기준을 설정하였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신앙인들을 지도하고 국가는 법과 공의로운 정치로 질서를 잡아줌으로써 신앙인들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 지도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백성들을 사랑하고 정직하고 부를 탐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기독교와 정치가 각 역할을 잘 감당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크리스천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 세상에는 독재정권이나 타락한 정치에 의하여 고통 받는 국가들과 국민들이 많이 있다. 아무리 민주화가 이루어진 나라라 할지라도 권력을 위한 야망과 경제적 이득을 위한 인간의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인이나 나라는 하나도 없다. 피조물이 다 함께 고통으로 탄식하고 하나님의 구속을 대망하며 우리는 살고 있다(8:22).

필자의 관점에서 기독교인은 정치의 권력에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서 한국과 같이 크게 양당으로 나뉘어서 정당정치가 이루어지는 경우,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때에 따라서 기층정치의 여당’, 아니면 야당둘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 개인의 종교적 신념, 정치관, 그리고 지역과 성, 그리고 사회와 경제적 요소들에 의하여 정치적 성향이 갈라지게 되어있다. 선거 때마다 크리스천들은 양당 중에 한 당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자신이 속한 정당의 후보가 선택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당선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확신한다. 바로 이 점이 교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위기이자 스스로 파는 함정이다.

설령 자신이 선택한 정치인이 당선되었다 하더라도 그 정치인의 모든 도덕성이나 정치인으로서 책임져야 할 책임이 하나님의 은혜로 면죄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위로부터의 권세란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 세상의 그 어떠한 권력보다도 크시다는 것이며, 만일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세가 올바르게 사용되지 않을 경우,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심판하셨다는 점을 우리는 중시하여야 한다.

크리스천의 정치관은 항상 성경에 기초하여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정당이나 정치인이 권력을 잡게 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그 정당이나 정치인이 과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지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하여야 한다. 정치는 사랑과 같은 것이 아니며, 단지 사회 구성원들에 의하여 정의와 평등을 실현하도록 위임된 권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크리스천은 자신이 원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이 권력을 잡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끊임없이 성찰하고 그 책임을 묻고 잘못된 것은 시정하도록 요구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정치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작용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호소하고, 이 땅의 시민으로서 정치적 참여를 통하여 올바른 정치가 작동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폭력의 대안은 평화가 아니라 권력이다.

 

크리스천으로서 만일 우리가 올바르지 못한 정치에 의하여 고통을 당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우리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부단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정치적 참여를 통하여 올바른 정치지도자와 권력을 만드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여야만 우리는 평화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네 번 째 문제는 이 세상의 폭력에 대한 어정쩡한 관점에서 발생한다. 역사 속에서 정치적 고통은 대부분 국가의 무력 정치와 힘이 없는 국민들 사이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그 피해 규모가 대체로 크다. 잘못된 정치인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아직도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수많은 정치적 난민들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는 직간접으로 겪는 이 땅의 폭력에 대한 대안을 평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평화가 있으면 폭력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폭력에 대한 궁극적인 대안은 평화이지만, 실제로는 폭력을 발생하지 않는 정의로운 권력이 없는 한 폭력은 중지되지 아니한다. 따라서 폭력에 대한 대안은 평화가 아니라 우선 일차적으로는 올바른 권력이다.

플라톤(Platon)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게 됨으로써 받는 벌 중의 하나는 자기보다 못한 인간들에 의하여 지배를 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함석헌 선생은 정치를 하면 그나마 덜 악한 인간들에 의하여 지배를 받을 것으로 보았다. 어거스틴(Augustine)은 평화와 전쟁이 누가 더 잔인한가 경쟁하다가 평화가 이겼다고 정의하였다. 왜냐하면 전쟁은 무장한 군사들만 거꾸러뜨렸지만, 평화는 비무장한 사람들마저 살해하였고, 전쟁은 공격당한 사람에게 가능한 한 반격의 기회를 주었지만, 평화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생명이 아니라 저항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는 죽음을 수여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냉정하고 명철한 정치적 식견이다. 이러한 현자들의 통찰력은 이 세상의 정치적 폭력에 대하여 좀 더 지혜롭게 사고하도록 우리를 돕는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국가의 폭력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었다. 하나는 기독교 현실주의전통에서 최소한의 악으로 최대한의 악을 방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비폭력 무저항주의이다. 전자는 어차피 인간의 정치적 억압과 권력의 욕망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그 권력이 폭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고, 또한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최소한의 악으로 더 큰 악을 억제하는 것이다. 현대 국제사회에서 UN의 역할이나 다양한 시민사회의 활동이 이를 대변하여 준다. 약소국가들이 연합하여 제국을 경계하고, 소수자들이 연대하여 다수의 횡포를 막는 역할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 현실주의에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최소한의 상대적 악으로서의 최대한의 악을 방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쟁의 경우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정당전쟁이 인정되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과 평화를 외치며 그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용인하지 말아야 하는데, 평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폭력을 수반하게 된다. 내 가족을 죽이려는 적군을 그냥 내 영토와 가정에 침입하도록 허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폭력을 이미 전제하기 때문에 이 폭력은 스스로 정당한 폭력이 되며, 상대의 목숨을 해할 수밖에 없으며, 엄밀하게 말해 성서의 관점과 배치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또 다른 대안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편 비폭력 무저항주의는 상대방의 폭력에 맞설 수 없는 허약한 정신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 전통은 정당전쟁론을 능가하는 고상한 신앙적 능력으로 관심을 받아왔다. 비폭력은 상대방의 폭력을 내 몸으로 수용하여 나를 끝으로 더 이상의 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 폭력을 중지하는 것이다. 폭력의 당사자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공중권세 잡은 마귀의 궤술로 여기는 것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한다. 여기에서 순교자의 피가 흐르지만, 상대방의 적의와 폭력은 거룩한 평화의 정신으로 정화되어 새로운 정신적 에너지로 바뀌게 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비폭력 무저항주의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을 신앙으로 믿는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정치적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아직도 쉰 적이 없었다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이 세상의 정치는 그 권력의 채우지 못한 욕망을 위하여 얼마나 더 정치적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폭력은 대상자가 피 흘릴 때 잠깐 멈추지만, 저항할 수 없는 다른 대상자가 나타나면 다시 시작이 된다.

따라서 필자는 폭력의 대안은 평화가 아니라 올바른 권력을 만드는 크리스천의 시민정신과 정치참여가 요구된다고 강조하고 싶다. 이 세상을 이기신 하나님,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는 말씀이 있기에 우리는 이 세상의 정치도 하나님이 통치하실 것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의 정치가 올바른 정치가 되도록 올바른 권력을 만들어야 할 사명도 있음을 각성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폭력을 허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권력이 폭력을 생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올바른 권력을 만들어야 한다. 올바른 권력만이 평화를 신장할 수 있다.

필자가 정의로운 권력을 만드는 일에 크리스천이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어거스틴(Augustine)과 그 입장을 같이한다. 어거스틴은 참된 하나님을 경배하며 올바른 의식과 진실된 도덕성으로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이라면 오랫동안 널리, 그리고 멀리 지배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큰 은사인 경건과 고결성이 진정한 행복과 현세에서의 복된 삶과 내세에서의 영생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선한 사람들의 지배는 자신에게보다는 사회 전체에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명한 정치지도자들이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력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허용된 민주 시민으로서의 참정권을 지혜롭게 활용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