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시 여기는 것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우리가 쓰는 에너지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문화나 문명이란 인간 사회가 역사를 통하여 구축한 일종의 집단적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그리고 공기가 없으면 생명체가 지구 내에서 생존할 수 없듯이, 문화나 문명은 인간에게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정신적 자양분의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정신문화, 음식문화, 의복문화, 교양문화, 군사문화, 정치문화 등등 인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인간의 성과 연령, 지역과 지방에 따라 집단이 상호 영향을 받으면서 가치관을 공유하며 사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언뜻 문화는 누구에게나 당연시 되는 보편적이고 중립적으로 보일 수 있다. 자신이 속하여 있는 공동체 안에서 익숙하게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은 이질문화를 경험하고 불편함을 느낄 때, 문화가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의 다양함은 때때로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문화는 자신에게 보편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적 환경에 따라서 이질적이기도 하며, 극단의 경우 상호 오해와 폭력이 발생하기도 한다.

인간이 익숙하게 느끼는 문화를 가만히 분석하면, “타율이 자율로 바뀐 것이라고 보면 된다. 어려서부터 인간은 부모와 주변의 중요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한다. 배뇨습관, 음식예절, 그리고 공중도덕이나 공공의 질서를 지키는 행위 등은 타율적으로 학습된 것이다. 문화는 인간의 집단의식으로서 스스로 집단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러한 타율을 자율로 바꾸어 규범을 형성하고, 인간은 그 틀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문화는 결합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과도 통하는 것이다. 즉 문화 안에서 자신이 당연시 여기는 가치관들은 개인과 부모 주변 영향을 주는 사람들과 환경적인 요인, 사회, 문화, 그리고 나아가 국가나 민족의식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문화가 이와 같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습득된 이러한 문화적 요소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옮기며 산다.

문화충돌과 정의(Justice)의 상관관계는 여기서 생긴다. 먼저 문화충돌은 앞에서 지적한 타율적인 것과 결합태의 특성을 통하여 형성된 자신이나 집단의 가치관만을 최고의 규범으로 인식할 때에 발생한다. 서로 다른 문화적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사전에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그 차이를 차별로 인식하지 않고 서로를 위한 배려로 이어진다면 충돌과 폭력은 막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차별이 심화되고 집단적이 되며 심지어 그 충돌의 규모가 종교나 민족, 그리고 국가 간의 문제가 대량학살이나 전쟁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분쟁, 여성차별, 그리고 민족 간의 갈등 이면의 내용을 살펴보면, 결국 자신의 가치관과 집단의 가치관을 절대시하는 것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

따라서 문화충돌에 대한 정의(Justice)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과제를 가진다. 그것은 각각 당연시 여기는 것에 대한 성찰, 문화적 편견에 대한 극복, 그리고 생명을 존중하는 공동체 형성에 이바지하는 시민의식의 함양이다. 첫째, 인간이 성장하면서 당연시 여기며 행동하는 것들은 대부분 타율성이 자율로 바뀐 것이다. 따라서 개인이 속한 문화 안에서 형성된 타율적 요소들이 얼마나 정의로운 지를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인격이나 취향, 그리고 세상을 향한 경향성 등에 유전적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환경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편견이나 타 인종에 대한 증오심, 그리고 타 문화에 대한 배격 등은 자신이 속한 사회 문화적 환경 속에서 습득된 것이다. 그렇다면 타율이 자율로 바뀌는 기계론적인 숙명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보편성아래로의 행동,’ 그리고 자발적인 소외의 경험이다. ‘보편성이란 그 어떤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평등과 자유에 근거한 사고를 말한다. 즉 금전적인 이해나 당리당략, 그리고 학연과 혈연의 이해를 넘어서는 초인간적 행위에 기반한 정신이다. ‘아래로의 행동은 권력을 지향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보다도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발적 소외란 기득권으로부터 배제당하는 경험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타율성이란 혈연과 학연, 그리고 지역주의와 민족주의와 연관이 되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가치관을 우선시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 관계를 넘어서서 약자들의 편에 서면 약자들을 밟고 서있는 기득권으로부터 배제되는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언뜻 보면 손해를 보는 삶이지만, 이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없는 정신적 유산이 있는데, 그것은 자유이다. 이는 이 세상에 속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로서 도피가 아닌 세상으로부터의 자유인 셈이다. 결국 개인이 문화와의 유기적 관계에서 파생하는 문화적 제국주의나 절대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자신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정화할 수 있는 영성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해방적인 영성으로서 인간의 욕망을 끊고 자신의 내면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때 문화적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이상적인 인류공동체의 건설에 이바지 할 수 있다.

둘째, 만일 타율이 자율로 바뀐 이면의 비본질적인 것을 순화하여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다면, 인간이 무엇을 위하여 자신이나 집단에게 맹종하고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종족보호의 본능을 통하여 아무리 불합리한 집단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위하여 거기에 숨어서 반사이익을 취하려고 한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보호를 위하여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요인들을 필요로 하지만 이 중에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에 필요한 기본 식생활, 즉 경제적 요인이며 다른 말로 하면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생존에 필수적인 식량에너지와 그리고 가정과 사회와 산업을 운영하는 자원에너지가 없이는 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 과거 인간은 수많은 전쟁을 통하여 무자비하게 식량에너지를 탈취하고, 심지어 인력을 동원하기 위하여 인간을 노예로 부리기도 하였다. 인류사회에 있었던 대부분의 전쟁은 식량에너지의 확보에 있었기 때문에 제국들은 군사들을 동원하여 식량을 거두어들이고, 속국들을 만들어 식량을 비축하여 나갔다. 따라서 육로의 확보와 바다의 패권은 필수적이며, 이제는 공중을 둘러싸고 제공권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 되었다. 문제는 과거 식량에너지 확보를 위한 전쟁이 이제는 국가의 산업 자원을 확보하는 자원에너지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현재 국제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분쟁은 석유에너지 자원과 광물에너지 자원의 확보, 그리고 핵 에너지와 연관되어 있다. 에너지가 없는 나라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수 없다. 많은 에너지 자원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안정적인 집안단속, 즉 정치의 안정이 없으면, 대부분 정권의 부패로 말미암아 독재나 엄청난 빈부의 차이로 대부분의 국민은 고통을 겪게 되며 제국에 예속된다.

결국 19세기 이후 국제 사회는 전통적인 식량에너지의 확보로부터 자원에너지의 확보를 위하여 전쟁으로 고통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서는 인간이 의지하고 있는 에너지에 대한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한다. 인류는 지금까지 생존하여 오면서 대부분 태양에너지에 의지하여 왔다. 현대 눈부시게 발전한 문명 속에서 우리는 태양을 의식하지 못하고 산다. 우리의 선조들은 태양과 지구의 미묘한 거리의 차이에 의하여 때로는 옷을 가볍게, 또는 두껍게 입고 음식도 계절에 따라 제철 음식을 먹는 방법을 택하여 왔다. 그러나 석탄에너지, 석유에너지, 그리고 원자력 에너지의 출현이후 인간은 냉장고의 발전과 함께 식량에너지를 저장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으며, 생존에 필요한 음식이 아니라, 이제는 으로 음식을 판단하며 채울 수 없는 미각의 욕망만을 극대화하고 있다. 태양에너지가 아닌 석유에너지의 확보가 국가 간 쟁점이 되었고, 석유에너지의 확보에 기대는 생산력에 따라서 국가 경기는 롤러코스터를 타며, 이 에너지의 확보를 위하여 걸핏하면 에너지 전쟁이 일어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인류사회에 필요한 에너지의 사용에 그 뜻을 합쳐야 한다. 타율성에 젖은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과 국가의 에너지 확보에 혈안 하여 추구하는 이익을 위한 행위에 자칫 맹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에너지 사용에 있어서 철저한 자기반성과 아울러 인류사회가 구축하여온 문화나 문명에 대하여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인류사회가 의존하고 있는 석유에너지는 사회의 복잡성을 유지하는 필수에너지이다. 인간의 의복부터 가정, 주거지, 생산공장, 군수산업, 항공산업 등 석유가 빠지면 인간의 문명은 정지될 것이다. 웬만한 국가정권이라도 국민에게 이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지 못하면 유지가 힘들게 된다. 따라서 석유에너지의 확보는 그 어떤 정책보다도 우선시 된다. 따라서 문화나 문명의 충돌을 피하려면 인류사회가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 확보에 혈안하지 말고 태양에너지와 같은 자연에너지에 의지하여 사는 방식을 취하여야 할 것이다. 원자력 에너지의 효율성을 모르는 것도 아니며 석유에너지의 유용성을 무시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로 인한 끔직한 사고와 오존층의 파괴와 같은 환경재해에 대하여 우리는 깊이 반성하여야 한다. 만일 인류사회가 바람과 태양과 같은 에너지를 이용하여 서로 공생하는 방식을 취한다면, 지금과 같은 문화의 충돌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태양에너지의 활용방안을 당장 산업에 적용하기는 한계효용의 법칙에 의하여 그 효율성을 문제시하게 될 것이다. 즉 태양에너지를 이용한 자동차나 선박, 그리고 공장의 가동을 위하여 전기에너지와 같은 동력을 생산하는 일은 당장은 기술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초기 비용이 매우 많이 들어가겠지만 인류사회가 지혜를 모으면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고 본다.

셋째, 만일 문화의 충돌을 막기 위하여 자기중심적인 타율성의 반성과 에너지 자원에 의지하는 현대 문명의 변혁을 모색할 수 있으려면, 인류사회는 뜻을 합하여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을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하며, 특히 올바른 권력의 창출을 위하여 헌신하여야 한다. 계몽과 교육은 개인에 의하여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의 프로젝트가 되어야 한다. 국가는 환경을 보호하고 생명을 존중하며, 그리고 미래사회를 위한 생태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문화의 최고 가치는 생명의 사랑과 환경의 보호에 있다. 생명과 환경은 인류사회에 가장 중요한 두 요소이다. 생명이 없는 환경은 공허하며 환경이 없는 생명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인간이 발전시켜 온 문화는 이 두 가지 요소와 상관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생명과 생태환경을 소중히 여기기보다는 그것을 착취와 파괴적인 개발 그리고 소비의 대상자로 전락시켰다. 미각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무절제한 사육과 동물학대, 그리고 수자원의 훼손을 인간은 자행하고 있다. 더 많은 식재료를 확보하고 이를 세계에 내다 팔기 위하여 세계화를 외치지만 소비자의 선택을 세계화 하라!”는 구호의 결과는 전통적인 식량생산을 의지하고 살아 온 가난한 나라의 농민들과 어부들의 생존권 박탈로 이어진다. 석유자원의 확보를 위하여 명분 없는 전쟁이 반복되고 있으며,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안보경쟁은 군수산업의 확장으로 더 높은 파괴력을 자랑하는 신무기 개발로 인류사회는 치닫고 있다. 전 세계의 국가들이 일년에 쓰는 군사비를 60억의 인구로 나누면 약 30만원을 나누어 줄 수 있다. 군사비만 없애도 인류사회에는 굶어 죽어가는 어린이가 한명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의 국가들이 핵을 폐기하고 군비경쟁을 중지하고 인류 생존의 미래를 위하여 차라리 우주개척에 나선다면, 인류에게 더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의 이름으로 문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문화를 위한 헛된 노력, 즉 무절제한 에너지의 소비는 끝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권력이란 건강한 생태계의 건설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술보다는 과학철학을, 개발보다는 정신건강을, 석유나 원자력보다는 태양과 바람의 자연 에너지를, 그리고 무절제한 대량생산 보다는 절제를 배우는 교육을 시행할 수 있는 권력의 각성이 필요한 것이다.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정치공학 대신 철학으로 무장하지 않는 한, 인류사회는 미래가 없다. 따라서 정치에 헌신하는 각성된 국민들의 공공의식과 올바른 권력의 창출이 없이는 미래사회는 대안이 없는 것이다.

정의(Justice)는 구호가 아니라 과정이다. 정의는 불합리하고 왜곡된 사회를 정화할 수 있는 인간에게 남겨진 또 다른 가치관이다. 정의는 폭력과 억압에 대항하여 피어나는 정신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의로운 나라를 허락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계의 정의를 위하여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셨다. 인간의 문화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자아가 왜곡되고 사회의 부정의와 불평등으로 빠지게 되는 이 모든 원인은 결국 하나님에게 대항한 인간의 때문이다. 이미 배가 기울고 있는데, 이제야 백기를 드는 일은 구차하겠지만, 지금이라도 인류의 문명은 본질로 회귀하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잘못된 자유의지의 왜곡에 의하여 육욕의 방종과 그릇된 습관으로 필연이 되어버린 인간성으로 말미암아 파괴되어가는 세상 앞에서 우리는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 이를 위하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아의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또한 우리는 육욕을 채우는데 급급한 육신이 되어버린 인간의 운명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를 통하여 올바른 생명문화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문화의 충돌이란 욕망의 충돌과 다르지 아니하며 에너지 전쟁의 또 다른 이름이다. 여기서 '정의(Justice)'의 역할은 욕망을 억제하고 전쟁을 자행하는 집단의 권력에 대항하는 정신이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당시 문화에 소외된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부모 없는 이들과 함께하시고 저들을 구원하셨다. 주님은 사랑이라는 우주적 보편성을 우리에게 몸으로 보여주셨으며, 이 땅에서 권력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낮은 자들과 함께 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자발적 소외를 택하시고 선물로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천에게 문화적 충돌을 극복하는 일은 복음을 통하여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는 것이다.

문화는 그 스스로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하며 오로지 후대에 그 잘못된 결과를 유산으로 남겨줄 뿐이다. 따라서 미래가 의미가 있으려면, 과거의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는 길 외에는 없다. 현재 문화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헛된 시도를 중지하고 하나님이 주신 환경을 소중히 여기고 생명을 위한 문화의 창달이야말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이 어마어마한 우주에 먼지와 같은 우리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 그리고 이 무한하게 느껴지는 우주에 미세한 한 점 하나에 불과한 지구공동체를 허락하신 하나님, 이는 우주 공간의 낭비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 우주를 사용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하나님이 포기하실 이유가 없기에, 그리고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더욱 더 귀히 여기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사랑하고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고 소망이며 진정한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다. 문화라는 가면을 벗어 던지고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더 나은 생명공동체의 건설을 위하여 헌신하여야 할 것이다.

 

미연합감리교회 리더십저널 기고 20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