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인간화의 문제와 기독교의 영성

    

21세기에 들어서며 세계는 말 그대로 혁명의 시대로 치닫고 있다. 일반적으로 혁명하면 정치적 사안과 연관이 되어 피를 부르는 권력투쟁이 벌어지지만 작금의 산업혁명은 주로 경제적 부를 창출하는 산업기반의 획기적인 변화와 연관이 된다. 현재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4차 산업혁명은 18세기 이후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회변동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1차 산업혁명은 18세기 수공업시대에서 증기기관 중심의 기계화 혁명이라고 할 수 있으며, 2차 산업혁명은 19세기 후반 전기의 발명 덕분에 생산조립 라인을 대량생산 체계로 구축하게 된 대량생산 혁명을 말한다. 3차 산업혁명은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소위 디지털 혁명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한 정보기술시대를 말하며,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그리고 빅데이터(Big Data)를 기반으로 만물 초지능 혁명이라고 하며 사람과 사물 그리고 공간을 자동화로 연결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현재 국제사회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공장의 운영을 노동중심에서 로봇화로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특히 제조업부분에 획기적인 변화가 예측되는데 이러한 추세는 점차로 서비스업 부분까지 접목이 되어 지능형 로봇을 이용한 정비의료, 원격의료, 후생, 그리고 공공서비스 부분의 치안과 국방의 영역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와 같은 4차 산업혁명 진행되면 자연히 미래의 직업에 새로운 영역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사람들은 점차로 가상공간에서 교육이나 업무 그리고 오락을 하기 때문에 가상공간 디자이너가 미래 직업군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낼 것으로 보이며, 로봇이나 인공지능에 의하여 수행되는 업무처리의 책임소관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술윤리 변호사, 유전자 정보를 활용하는 바이오 관련 직업, 인간의 뇌와 소프트웨어 사이의 정보교환 또는 인체 장기 교체와 관련된 직업 등이 주목받고 있다. 아울러 현 문재인 정부 또한 미래 산업정책으로 3D 프리터와 드론 그리고 무인자동차 관련 직업을 육성할 것에 대하여 청사진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4차 산업혁명과 연관하여 일면 밝은 미래의 모습과 달리 우려의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것은 로봇을 통한 기계화에 인간의 소외 현상이 점점 더 깊어질 것이며 4차 산업혁명에 혜택을 받지 못하는 상대적 빈곤층이 더 확산될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로봇 기계화에 대한 설비와 투자의 이윤을 극대화 하려는 자본주의의 속성이 여전히 지속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 소외현상과 연관하여 주목 받는 점은 미래학자들이 종교가 미래사회에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고 강조한 점이다. 알파고와의 바둑 대결에서도 나타났듯이 미래 사회 각 영역의 빅데이터 중심의 초지능은 인간의 능력을 압도할 것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기계의 능력은 인간의 기계에 대한 의존도를 지나치게 하여, 인간성을 멸시하고 공동체 정신을 소홀히하기 때문에 더 높은 도덕적 수준의 윤리와 정신을 추구하는 종교가 역설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인공지능 로봇의 자유학습에 의한 능력의 개발이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과연 인공지능 로봇이 영화의 가상현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처럼 스스로 자의식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고민이 궁극적으로 인공지능 로봇 또한 신을 요청하게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토론도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인공지능 로봇 신을 섬기는 종교조직이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등장하는 등, 4차 산업과 연관된 문제들은 여러 방면에서 생각할 점이 많이 있다고 본다.

과거 3차 산업혁명까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여준 증기기관, 전기, 인터넷 정보통신 혁명과 4차 산업혁명의 큰 차이점은 바로 4차 산업혁명의 인간의 고유영역이라고 생각하였던 지능의 영역을 대신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 자처하였던 이유는 학습과 창조적 재능이 본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인공지능은 실행명령의 순서에 따라서 알고리즘(algorithm)’을 형성하게 되는데 비록 이것이 입력과 출력의 기계적 조작에 의한 것이지만 인간의 감정이입이나 개입을 배제하는 알고리름적 사고’, 즉 기계적 사고를 감정에 의하여 좌우하는 인간적 사고보다 우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최후 판단과 책임이 인간임을 잊게 하는 비인간화의 이면을 보게 하는 것이다.

전술하였듯이 4차 산업의 특징은 사물과 공간 그리고 인간을 연결하는 만물 초지능혁명이다. 인간의 육체적 노동의 영역을 대신하여 이제는 사고와 정신의 영역까지 이 혁명은 파고들 것이다. 필요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저장하며 그리고 분석하는 모든 것을 인공지능이 대신하여 인간의 생물학적 영역과 융합이 되기 때문에 기계와 인간의 영역이 모호하여지게 된다. 뇌파를 이용하여 인간 육체와 연결된 로봇 팔을 움직이며 심지어 뇌의 기억을 스캔하여 저장하는 기술 개발 가능성까지 점치고 있다. 이에 더 나아가 뇌에 저장된 내용을 3차원의 입체상인 홀로그램(hologram)’으로 만들어 인간을 불사(不死)의 존재로 만들겠다는 과학자들까지 등장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인간을 융합하는 기계화의 유용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계가 인간의 육체적 영역을 넘어 정신적인 영역까지 대신하려는 이 때 떠오르는 질문은 과연 미래 사회에 인간이 더 이상 우리가 생각하였던 인간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인가?”이다. 그것은 신인류일까?

20세기에 들어서 21세기를 내다 본 미래학자들이 예견한 미래오래 된 것이라는 지적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한다. 즉 미래란 오래된 과거의 다른 말이라는 것이다. 미래가 의미가 있으려면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전제될 때 미래는 희망이 있다는 저들의 지적을 상기하여 볼 때, 우리 인간은 자신의 역사와 발전 그리고 때로 주목할만한 결과들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허비하고 희생하여 왔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자아실현과 자유 그리고 계몽과 과학기술을 추구하며 인간 이성의 진보를 이루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현 주소는 과연 어디인가? 하나밖에 없는 지구를 수십 번 쪼개고도 남을 핵의 보유와 이어지는 원전사고들, 무분별한 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지구 온난화와 이상기후, 고갈되어가는 지구자원을 확보하려는 열강들의 끊임없는 에너지 전쟁, 바다에서 표류하는 수많은 난민과 값싼 노동력을 찾아서 지구 구석구석을 방황하는 이주 노동자들, 내전과 테러의 위협, 종교의 분쟁과 인종의 갈등, 그 어떤 문제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4차 산업의 환상에 빠져드는 것은 또 다른 몽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는 인간이 성취하여 온 과학기술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역사 속에서 보여 준 진정한 인간성이 없는 역사의 발전, 그리고 반성이 따르지 않는 기계화의 허구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앞에서 교회의 역할은 바로 기계화에 직면한 인간성의 문제에 전념하여야 한다고 본다. 학교 교육이 부호화된 데이터를 알기 쉽게 해석하고 사고력을 키우는 코딩교육에 관심을 가지는 이 때, 인간적 실수를 기계의 오류처럼 생각하고, 실수가 커지면 기계의 오작동 또는 노후화 경우처럼 부품을 아예 교체하는 식으로 인간을 제거하여 버리려 하고, 인생에 문제가 더 커지면 고통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추구하여 영성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자체를 재부팅하는 식으로 인간을 기계처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닌 지 깊이 우려된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이제는 기도의 땀방울이 스며든 성경책이 아니라 버튼 하나로 검색할 수 있는 핸드폰이 대신하며, 생수의 줄기를 찾는 심정으로 경청하던 설교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이젠 메뉴를 고르듯이 선택하게 된 변화된 교회의 일상은 우리가 바라는 영성이 아닌 기계화의 문제이다. 인공지능이 음악을 작곡하고 소설을 쓰듯이 성서와 관련된 주제어만 입력하면 인공지능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예문과 설교 그리고 찬송가를 빅데이터에서 처리하여 창의적인(?) 설교와 기도문을 만들고 찬송을 작곡하게 될 것이다. 로봇 신이 있듯이 로봇 교인들은 입력된 주일 예배 시간에 와서 예배를 드릴 것이며, 로봇이 설교하고, 주방에서는 로봇 셰프가 요리를 만들고, 그리고 교회 입구에서는 로봇이 교인들을 안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과연 미래교회의 모습일까?

'올바른 인간성'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에게서 그 원형을 우리는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고통의 자리에 늘 함께 하셨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숨어있던 피조물을 찾아 먼저 말을 걸어오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바벨탑을 쌓고 신처럼 되고자 한 이들을 용서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수백 년을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며 고통을 부르짖을 때 그 소리를 들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육신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인간들을 위하여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죄의 짐을 져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가난하고 눈멀고 가족을 잃고 홀로되어 슬퍼하는 이들 속에 함께하셨으며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편이 되어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옆구리에 깊은 상처를 입기까지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셨던가?

미래교회의 본질은 바로 이 사랑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을 이겨놓고도 승리하였다는 희열을 느끼지 못한다. 죽은 자식을 안고 주님께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고통을 기계는 이해하지 못한다. 좌절하고 낙심하며 또 용기가 필요한 이들에게 어깨를 감싸주는 우정이 무엇인지 기계는 알지 못한다. 자신의 소중한 장기를 내어주어 또 다른 생명을 살리려는 희생에 대하여 기계는 그 이유를 해석하지 못한다. 아픈 자와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는 공감을 기계는 가지지 못한다. 설사 이 모든 인간의 감정들을 코딩하여 인공지능 로봇이 표현하도록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기계의 부호화된 동작 신호일 뿐 인간의 그것은 아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방금 지난 이 즈음에 우리가 교훈으로 삼는 것은 루터의 양심이 종교권력에 맞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였던 그러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모를 때,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무소불위의 종교권력을 휘두를 때, 루터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교회가 교회다워져야 함을 주장하였다. 4차 산업혁명에 종교개혁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논지 외의 말처럼 들리겠지만 미래 사회 초지능의 기계화에 맹신하지 말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인간화의 문제에 대하여 교회는 준비하여야 한다고 본다. 산업이 혁명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교회의 개혁과 영성의 회복을 외쳐야 할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인간이 더욱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인간으로 지어진 것에 감사하며 그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셨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새로운 몸을 입혀주시고 영생을 준비하여 주셨다는 부활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기계화되고 파편화되어가는 세상을 위하여 주님이 맡겨주신 복음의 사명이 그 의미를 다시 드러내는 것이며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2018. 1 기독교세계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