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 테일러 - 거룩한 죽음



김정록



  제레미 테일러의거룩한 죽음 5장으로 되어있다. 1장에서는 묵상을 통하여 거룩하며 복된 죽음을 준비하는 , 2장에서는 거룩하고 복된 죽음을 위한 일반적 준비 : 훈련을 통하여, 3장에서는 질병의 상태와 그에 따른 유혹들, 그리고 유혹들에 관한 적절한 처방에 관하여, 4장에서는 질병의 산태에서 환자가 홀로 행할 있는 은혜의 실천에 관하여, 5장에서는 환자의 방문에 관하여 : 또는 임종하려는 자를 위해 성직자의 사역을 통해 있는 도움에 관하여로 되어있다. 제레미 테일러는 특히 3~5장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질병에 걸렸을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 깊게 다루고 있다. 그는 질병이 죄의 문제이며, 질병의 고통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파괴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오늘날 비슷한 부분과 다른 부분이 있다. 비슷한 부분은 오늘날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질병앞에서 고난을 겪고있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점은 오늘날 질병은 죄의 대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환경의 영향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질병에 걸리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거나, 기도원에 가기 보다는 유능한 의사에게 찾아간다. 또한 병원 심방을 목회자들도 질병에 걸린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은 죄를 회개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질병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파괴한다는 점은 똑같다. 그렇다면 질병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파괴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질병을 포함해서 인간의 삶에서 고통을 주는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공격하고 파괴한다. 그래서 나는 제레미 테일러가거룩한 죽음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단순히 질병에 의한 그리스도인의 어려움이 아닌죽음의 공포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장 일반적으로 설명하기 쉬운 질병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것 같다.

  제레미 테일러는 죽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1장에서 인간의 삶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한 경주를 시작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났으면 반드시 죽는다. 어쩌면 인간의 진정한 평등은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나타나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인간에게 죽음이란 너무나 당연하게 예정되어있는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죽음을 너무나 두려워 한다. 대체로 가진것이 많은 사람이나, 세상에 미련이 많은 사람일수록 죽음을 더욱 두려워 하는것 같다. 제레미 테일러는 이러한 자들에게 죽음은 피할 없는 것이며, 훈련을 통해 그리스도인다운 거룩한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거룩한 죽음 읽고 나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러다 문득 어렸을 읽었던 글이 생각이 났다.


내가 태어났을

나는 울었고

주변의 모든 사람은

웃고 즐거워 하였다


내가 몸을 떠날

나는 웃었고

주변의 모든 사람은

울며 괴로워 하였다


  • <티베트 사자의 > 중에서


  내가 아직 어렸을때 나에게 삶이란 고통이었고 죽음은 약속된 휴식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교회에서 말하는 죽어서 가는 천국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반면 살아가는 내가 살아가는 삶은 고통의 연속처럼 느껴졌다.

  이처럼 삶의 고난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제레미 테일러는 천국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선 현실의 삶의 고통을 인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의로우신 재판장이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또한 요한계시록 2-3장을 통해 교회들에게 고난을 이기고, 이기는 자에게는 상급이 있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삶의 고난을 인내하라고 말하는 제레미 테일러의 말에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YOLO(You Only Live Once)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의 말이 얼마나 공감 생각해봤다. 특히 요즘 시대의 젊은이들은 인내의 삶으론 극복할 없는 사회적 문제들을 바라보면서, 인내의 삶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게 퍼져있다. 시대의 젊은이들은 아무리 노력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없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주변에서도 이제 취업해서 밀린 학자금을 갚아나가는 사람들을 쉽게 있다. 또한 학자금을 받아가면서 공부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이렇게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YOLO 유일한 구멍의 역할을 하고있다. 이런 이들에게 제레미 테일러의 인내는 공감받기 보다는 분노를 일으킬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인내의 가치관을 전하려다 비난을 당한 사람이 있다. 김난도 교수는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으로 젊은이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김난도 교수는 젊은이들에게 인내의 가치를 전하려고 했지만, 고통속에 몸부림치던 젊은이들은 그의 조언이꼰대들의 잔소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제레미 테일러가 말하는인내 시대의 젊은이들에겐꼰대들의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제레미 테일러가 말하는인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기다림을 뜻한다. 그렇기에 제레미 테일러의인내 김난도 교수나, 일부의 어른들이 말하는 인내=노력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젊은 이들에게 인내라는 단어는 그들의 상처를 휘젓는 것이며, 그들의 아픔을 키우는 것이다. 그렇다면인내 전하지 말아야 할까? 그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은 제레미 테일러의인내소망이라는 단어로 사용해서 전하는 방법을 생각해 봤다. 제레미 테일러의인내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기다림을 뜻한다. 말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대에 상처받은 젊은이들에게 무조건 견디라는 뉘앙스의인내라는 단어 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소망 전하는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품은 사람은 현실의 어려움을 견딜 있는 힘을 얻는다. ‘인내소망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같다면, 부정적인 뉘앙스로 해석될 있는인내라는 단어보다소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을것 같다. 또한 개인적으로 시대의 상처와 아픔속에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하나님 나라의소망 통해 살아갈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고난을 이겨내서 사도 바울이 말했던 의의 면류관을 쓰고, 계시록에서 말하는 이기는자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