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의 형성 단계

   틸리히는 “믿음은 인격의 총체적이고 중심적이고 무조건적인 행위이며 무한하고 궁극적인 관심이다.”(41)이라고 이야기 한다. 결국 이것은 개인적인 영역을 넘어 공동체적 관심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는 말한다. “믿음의 행위는 모든 인간의 영적인 삶 안에서 일어나는 행위들처럼 언어와 공동체에 의존해야 한다.”(60) 결국 이것은 상징화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틸리히는 믿음과 상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징들을 통해서 믿음을 인식한다. (160), 궁극적인 관심에 대한 모든 표현들은 상징적이다. (191)”
   틸리히는 이 믿음에 대해 기독교적으로 국한시켜 이 책에 표현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그가 말하는 믿음은 인간 본유적 특징인 궁극적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즉 모든 종교와 무신론자까지도 포함되는 개념이다. 그는 이러한 믿음이 형성되는 일정의 패턴을 이야기 하는데 믿음은 먼저 궁극적인 관심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공동체와 그의 언어를 전제로 하고 이를 통해 믿음의 상징이 형성이 된다. 이렇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무한한 존재를 이성으로 인식한다. 틸리히는 믿음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서 “믿음은 이성이 황홀적 상태에서 이성 너머의 것에 이를 때 일어나는 행위이다.”(135)라고 말했다. 즉 인간은 상징들을 이성을 통해 이해함으로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논리는 마이클 노박의 이론과 비슷한 면이 있다.  마이클 노박에 의하면 인간은 가장 먼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로 표현한다. 이것은 이야기의 편재성, 독창성, 필연성을 의미한다. 마이클 노박은 실재의 자각에서 이야기로, 이야기에서 상징으로, 상징에서 원리로, 원리에서 행위나 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순서를 가지게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노박과 틸리히의 주장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즉 노박이 주장하는 것은  ‘경험 → 이야기 → 상징 → 이론체계’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이며, 틸리히는 ‘궁극적 관심 → 언어와 공동체 → 상징 → 이성을 통한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믿음에 있어서 공동체의 중요성

   이렇게 믿음이 형성되는 단계를 인식할 때 우리의 믿음은 개인적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틸리히는 “믿음은 행위를 이끌고 행위는 공동체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 관심의 상태는 오직 행위의 공동체 안에서만 실제 할 수 있다.”(190)라고 말한다.
   즉, 모든 믿음은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도 고립된 개개인에게 주어진 계시가 아니다. 틸리히가 말하는 것처럼 언어를 통해 전달된 이야기로서 전승된 공동체이다. 하우어워스 같은 윤리학자는 그래서 공동체의 개념을 이러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는 믿음의 선배들까지 포함해 공동체적인 의미를 확장시킨다.
   따라서 우리 믿음의 형성에도 그 믿음의 모습을 몸소 실천해 보이며 이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서로를 바로잡아 주며, 서로를 용서하며, 함께 분투하여 예수를 따라가며, 그 분의 길이 우리의 길이 될 때까지 그분의 움직임을 기억하면서 동역하였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금 우리 믿음에 있어서 이러한 공동체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 틸리히의 한계

   이상에서 믿음에 대한 틸리히의 견해에 동조하는 의견을 냈다면 이제는 틸리히에 대한 비판을 해보고자 한다. 틸리히는 믿음의 진정성이라는 쳅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언급한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상징을 창조한 십자가 사건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의 진정성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했다. …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는 믿음의 진정성 아래 그 어떤 믿음의 진정성도 ‘그렇다’와 ‘아니다’라는 판단아래 있게 된다. 종교개혁 기간 동안에 교회가 분열된 것은 공식화된 교리들에 대한 반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어떤 교회라 할지라도 궁극적인 자리에 놓일 권리가 없다는 원리의 재발견 때문이었다. … 이 기준은 종교와 문화의 전 역사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기준이어야 한다.(163)

   결국 종교 개혁이라는 것도 궁극적 관심을 절대화 할 수 없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 자체가 이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틸리히는 주장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인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주적인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분의 이야기적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명을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무신론자를 비롯해 비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합리적인 논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틸리히는 오히려 복음의 진리를 훼손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