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란 무엇인가?
이번 학기 작은대학을 통하여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 그리고 그리스비극을 접할 수 있었다. 너무나 방대한 양이며 다양한 배경지식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제대로 100% 소화하기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내게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으며, 그 중에 하나는,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호머의 이야기와 그리스비극을 공부하면서, 거기에서 제시되었던 표현 중 하나는 ‘역사는 광장에서 이루어지는 민중들의 이야기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나에게 익숙했던 역사에 대한 고전적인 표현과는 색다른 것으로서 역사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역사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찾아보게 되었다.

신채호 - “역사는 我와 非我와의 투쟁이다.”
공자 - “옛 것을 알고 새 것을 익히면 위대한 선생이 될만하다.”
토인비 -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기록이다.”
E.H 카 -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계속적인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칼라일 - “역사는 모든 과학의 기초이며 인간정신의 최초의 산물이다.”
마르크 블로크 - “역사는 다양한 인간성의 거대한 경험이며 인간간의 오랜 만남이다.”
랑케 - “역사란 결국 객관적 사실이다.”

이렇게 역사 속에 존재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학문적 그리고 정치․경제․사회적 배경 하에, 자신 나름대로의 역사에 대해 해석하였고, 그것은 또한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서 나에게 제기 되는 질문은, “그렇다면 나는 역사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특별히 신학적 배경 하에, 그리고 그러한 가치관을 내면화하고 있는 내가 ,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기독교 역사관은 분명한 역사의 시간과 공간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하나님께서 직접 인류의 삶 속에 개입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교리인 성육신 교리는 동시에 역사의 중심교리이기도 하다. 나 역시 이러한 기독교 역사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믿음으로 고백하지만, 단순히 그것을 교리적 차원에서, 종교적 언어로서 인식하지는 않는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배경 하에,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나의 경험과 사고에 의해 바라보는 ‘역사’는 ‘상실되었던 본래 가치의 회복’이며, 이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지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 그리고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본래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가치의 회복을 끊임없이 지향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의 곳곳에는 가치나 의미의 왜곡과 굴절이 수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학문의 영역에서, 일상생활의 영역에서 나타나는데, 특히 ‘언어’에서 그러한 현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경제(經濟, economy)라고 할 수 있다. 경제학의 본디 뜻은 집안(oikos)을 돌본다는 규범(nomos)의 뜻이 들어 있었다. 경제를 한자어로 풀이하자면, 이것은 ‘경국제세’(經國濟世)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서는, 국가의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경영’이며, ‘다스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경제’를 한다는 것은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며, 동시에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의 경제는 본래의 가치와 의미가 축소 혹은 왜곡되어, 국가를 경영하고, 세상을 구제하는 가치로서의 ‘경제’가 아닌 인간의 욕심이 무한으로 투영된, 그리하여 자본이 자기증식을 무한히 추구하듯, 자본에 종속되어 있는 인간이 다른 사람, 자연, 세계에 대한 배려나 관심 없이 무한히 자기증식에 빠져 있는 것이 경제의 적나라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제는 상생과 화해가 아닌 폭력과 파괴를 낳았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해를 입었으며, 동시에 자연 역시 몸살을 앓고 있으며, 그 아픔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의 과정으로서 그리고 내용으로서 ‘가치의 회복’이 필요하다. 인간의 가치, 자연의 가치,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상호의 가치, 그리고 이 안에 담겨 있는 학문과 일상 언어 등에 있어서 본래 의미가 회복되어야 한다. 가장 시급히 회복이 요구되는 ‘경제’ 역시 본래의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하여 본래 그것이 담고 있는 돌봄과 상생의 가치, 나눔과 이해의 가치를 이루어 가야 한다. 원자화 되고, 점점 폐쇄화 되는 세상 속에서, 이러한 본래 가치의 회복은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 나라 안에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모든 요소들 안에 질서와 조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헤로도토스 VS 투키디데스
“헤로도토스는 학문적인 접근이나, 전략적 식견을 얻으려고 하는 후대의 지시인 계층, 혹은 정치가 계층을 위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 하나하나에 바로 반응하는 청중을 상정하고 이야기를 꾸며 나갔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가 소수의 지식인 계층이 아니라 대중을 염두에 두고 책을 구성한 것이다.(<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타난 문학적 장치로서의 신탁과 꿈>, 윤 진.)

근대화의 일환으로서 국가주의가 근대 역사학 탄생의 주요 배경이듯이, 고대세계에서도 투키디데스가 헤로도토스를 제치고 역사서술의 준거로 인식되는 배경에는 비슷한 국가주의가 작용한다. 그 결과 역사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정치-군사 엘리트에 국한되고, 역사 읽기가 엘리트 양성의 요건으로 간주된다. 비록 흥미가 없더라도, 장차 일어날 정치-군사적 사건에 관해 유익한 교훈을 기대하는 통치계층이 그것이다.(<헤로도토스를 위한 변명>, 김경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