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

 

1513년 심장해부를 하던 레오나르도는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책 한권을 쓰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심장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평소에 친하지 않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평전을 읽으며 생각했다. “한 사람의 평전을 읽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정확이 560년 전에 빈치에서 태어난 천재이다. 천재에 세상을 움직인다라는 엄청난 문장에 한 몫을 감당한 사람이었다. 천재라는 것이 그를 뒤쫓는 고정관념이라고 해서 그가 완벽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그가 형이상학적 이상을 추구한 것에 비해 매우 현실적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떠올리면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와 모나리자, 그리고 최후의 만찬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남는 것은 유명한 작품들의 제목이 아니라, 그 작품이 생겨나기까지의 그의 심오한 고민이 있었다는 것과 그의 삶이 가치있는 것은 그의 예술 작품의 가격 때문이 아니라, 수세기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그의 정신세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에 대해 가장 먼저 알게 된 사실은 그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받은 교육은 정규 학교교육과는 거리가 멀어서 라틴어를 배우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그는 평생 동안 책을 통한 학습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을 선호했고, 처음으로 예술에 대항 깨달음을 얻은 것도 예술 원칙에 대해 특정훈련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지역 교회에 소장된 조각품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가 처음 예술의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되었을 때를 상상해 보았다. 문맹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천재성이 처음부터 그를 스타가 되게 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10년 동안이나 대가인 베로키오의 작업실에서 신참 일꾼 혹은 하급자로, 아마도 모델로 일하는 동시에 지도를 받는 학생으로 지냈을 것이다. 학생들은 대부분 스승의 견본 책을 본떠 데생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레오나르도도 여느 학생들 사이에서 데셍으로 미술 교육의 기본을 배워나갔을 것이다. 책 곳곳에 담긴 그의 습작들은 그가 얼마나 미술에 대한 열정이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노트에 그가 담아야 하는 모습들을 빠르게 스케치하였고, 또 미술작품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경험들을 꾸준히 쌓아나갔다.

그의 젊은 시절에 관한 묘사들은 하나같이 그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아낌없는 칭찬을 하고 있다. ‘그는 매우 매력적인 사람으로 균형 잡힌 몸매에 우아하면서 출중한 외모의 소유자였고,’ 아름다운 곱슬머리가 가슴의 중간까지내려 왔다. 그가 모델로 활동했었다는 배경으로 보아 그가 그린 작품들에 등장하는 어린 소년의 모델은 아마도 레오나르도 자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에게는 화려한 외모만을 보아서는 안 되고, 그의 얼굴에서 불확실성과 외로움을 찾아내야 하고, 불만족으로 괴로워하며, 이방인이자 사생아, 문맹이자 합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동성행위자인 자신의 모습 때문에 아파하는 그의 모습을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가 30살이 되었을 무렵의 생활은 도제생활에서 독립하고 경제생활은 매우 어려웠던 시기이다. 그는 물감을 살 여유도 없었고, 곡식과 와인도 외상으로 사야 했고, 수도원을 위해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해야 했으며, 장작도 스스로 사서 때야 했다. 그는 해부학자로서의 삶에서도 큰 의미를 찾아갔다. 그는 엔지니어나 발명가, 건축가로서의 삶을 살기도 했다. 그래서 전시에 쓸 무기들에 대한 간단한 데셍과 설명을 상세히 적기도 했다. 그의 상상력과 호기심은 인간의 신체에 까지 넓게 퍼져나갔다. 당시 시체의 냉동보관이 없었던 시절 그는 시체에서 나는 악취를 맡으면서까지 신체 해부에 몰두했었다. 해부학에 관한 그의 관심은 화가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것이었고,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그는 최후에 만찬에도 등장하는 극적 상황을 긴장감으로 가득한 뒤틀린 목의 근육으로 표현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