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문제는 과학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극복하지 못하는 정신적인 공허함이다. 즉 학문은 있으나 지혜는 없으며, 기술은 있으나 정신적인 에너지는 없고, 공업은 있으나 생태학은 생략하고 있다. 유사종교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여온 근대의 이념은 진보와 발전이었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비인간적인 결과와 자연환경의 파괴, 이에 따른 대규모 사회적인 불안으로 귀착되었다. 진보적인 사고가 내포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근대가 보여준 가치 파괴 대신 가치 변화를 모색하여야 할 때이다. 즉 윤리적인 책임을 인정하는 과학, 인간을 지배하기보다는 인간성에 기여하는 기술 공학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산업으로부터 자연과 일치하는 인간의 관심사와 욕구를 증진시키는 산업에로, 그리고 형식적인 민주주의로부터 자유와 정의를 통하여 화해하는 민주주의에로 회귀하여야 할 것이다. 근대에 보여 준 인간 잔혹성의 극치는 ‘아우슈비츠’가 대변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프리모 레비(Primo Michele Levi)는 수용소 안에서 끔찍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목격하고 참아낸 일들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지로 살아남았다고 술회하였다. 그는 ‘인간성’에 대하여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마치 그것은 “클라이맥스는 갑자기 찾아왔다.”는 그의 표현에서 드러난다. 그는 인간을 역사의 무법칙에 노출된 한없이 가련한 존재로 보았다. 즉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방문에 인간은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에게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하는 하루하루는 마치 ‘배신자’를 만나는 일과 같은 것이었다. 무의식 속에서 꾸었던 밤의 꿈이 현실에서는 그의 기대를 산산이 깨뜨렸기 때문이다. “꿈을 꾸는 건 슬픈 일이다. 꿈에서 깨어날 때, 그 의식의 순간은 그 어느 순간보다 날카로운 고통을 준다.” 따라서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그에게 마치 무(無)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여정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레비에게 불면은 오히려 꿈속의 고통스러운 잔영들을 그의 몸에서 떨쳐버리려는 행복의 순간처럼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러한 레비에게 한 가지 희망이 있었다면 그것은 ‘역사의 증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모습을 보겠다는 희망’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수용소에서 나름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의 종류를 언급하였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잔인한 인간들’이었다. 이들은 그 어느 누구도 고려하지 않는다. 다만 정글의 법칙만이 지배할 뿐이다. 자신이 살기 위하여서는 목적도 수단도 없고 친구도 이념도 없다. 단지 살아남아야 하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주변의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무자비한 사람들이다. 둘째 종류의 사람들은 소위 ‘전문인들’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든 허드렛일을 감당하여야 하는 노예와 같은 사람들이다. 독일 군인들이 운영하는 수용소의 체제 유지를 위하여 화학 연구로부터 청소하는 일까지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해야 한다. 세 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우연한 기회로 독일 군인들과 친분을 쌓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생존의 가능성은 나름 더 많게 된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남의 생명을 돌보거나 배려하는 인간애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레비의 육필에서 드러난 것처럼 인류의 역사에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현재 지구 도처에서 일어나는 국가 간의 전쟁과 테러 속에서 진정 ‘인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현실은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희망’과 ‘인간다움’의 흔적을 찾아가는 인류의 노력이 인종과 이념의 장벽을 넘어서 인류사회에 평화를 심어줄 수 있을지 현재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블로흐(Ernst Bloch)는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로서 ‘꿈’을 소개한다. 그는 꿈을 ‘밤 꿈’과 ‘낮 꿈’으로 나누어, 보통 의식하지 못한 것이 밤 꿈을 통하여 드러난다는 프로이드의 설명에 제동을 걸었다. ‘밤 꿈’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대상으로서 인간의 억압된 욕망이 나타나는 곳이다. 이 ‘밤 꿈’에서 인간의 무의식은 미래보다는 과거의 나락으로 떨어지며, 자아는 꿈속에서 구속당하고 철저히 왜곡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의 무의식은 단지 꿈에 나타나는 상징들을 통하여 과거에 이루어지지 않은 욕구를 퇴행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반면에 블로흐가 주목하는 ‘낮 꿈’은 ‘유토피아’가 출현하는 ‘희망’의 장소이다. 프로이드가 설명하는 ‘밤 꿈’이 ‘더 이상-의식되지 않는-것’만을 암시하는, 즉 과거의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블로흐가 말하는 ‘낮 꿈’은 ‘아직-의식되지 않은-것,’ 즉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래를 드러내는 장소이다. ‘낮 꿈’을 통하여 인간은 스스로 자아의 자유로운 활동을 펼치고, 자신과 연관된 주위세계와 타자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따라서 ‘낮 꿈’에 나타나는 내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인간의 위대한 독창성과 창조력이 발휘되는 가능성이 드러나는 곳이다. 레비의 육필에서 우리는 인간에게 희망이 없음을 본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 블로흐가 주목한 꿈을 꾸어야 한다. 그 꿈은 과거의 나르시즘이 아니라 미래로 향하는 현재의 자기실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실현의 목적은 자신의 생존이 아니라 공동체가, 우리 사회가,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모든 인류가 상생함으로서 후손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전하여 줄 수 있는 그런 ‘희망의 꿈’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소중하다.”라는 명제로 바꾸어지는 새 희망을 가지면서 폭력의 근대를 넘어서 소망의 미래를 다시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