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공성과 교회

 

최근 세월호 참사로 말미암아 한국 사회가 고통가운데 있다. 자녀를 잃고 슬퍼하는 유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면서도 또 한 편 더 고통스러운 이유는 이 책임을 져야할 당사자들은 전혀 고통을 분담하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의 관점으로 보면 이번 세월호 문제는 전형적인 관료제의 부패이며, 경제적으로 보면 비정규직의 문제이고, 신학적으로 보면 생략의 죄(sins of omission)와 위반의 죄(sins of commission)이고, 사회적으로 보면 공공영역의 몰락이라고 할 수 있다.

공공영역이란 공동체와 사회가 발전하기 위하여 가치 있는 일을 실현하는 공동의 장을 의미한다. 형식적으로 보면 이 공공영역은 전통적으로 국가나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그 권한을 위임 받아서 공무를 수행하였지만 사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시민의 연대와 관계를 통한 성숙한 공동체 의식이다. 국가는 공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 법의 안정을, 정부와 기관의 공무원들은 책임의식을 가지고 공무를 수행하는 자부심을, 시민은 그러한 공적 가치들이 실행될 수 있도록 세금의 의무와 법의 준수를 통한 시민의식의 실천을 통하여 공공영역은 형성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공적 성격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는 국가와의 공적 관계에서 크게 세 가지 입장을 취하여 왔다. 하나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천부적 질서 차원에서 국가가 하나님의 뜻을 정의롭게 수행하는 도구로 이해하였다. 주로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어거스틴과 루터에게서 나타나는 사상으로서 타락한 국가나 정부에 대한 저항권이 미미하나마 강조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국가를 반기독교적인 세속적으로 이해하여 아나키스트(무정부) 관점을 취하는 입장으로서 교회 역사 속에서는 섹트와 같은 입장이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전자가 나름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 공적영역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고 세상을 변혁해 나아가는 관점을 지향하였다면 후자는 신앙의 본질이 훼손되지 아니하도록 교회의 정체성을 보전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가톨릭과 같은 구교는 자체의 종교적 영역을 국가 우위에 두어 교회와 국가 사이의 공공영역의 구분이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나름 사회법 위에 자연법을 강조하여 사회적 책무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꾸준하게 개진하였다. 비근한 예로 개신교의 칼빈도 제네바시를 중심으로 한 신정정치를 강조하여 국가의 정치보다도 신앙의 가치를 위에 두었었다.

지금까지 간략한대로, 역사 속에서 교회는 국가와의 상대적 관계에서, 또는 국가 보다 우위에, 아니면 국가의 영역과는 별도로 교회와 신앙인의 책임을 강조하여 왔다. 그러나 전문화된 현대 사회에서 교회의 공적영역을 논하기는 매우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현대 교회론은 예수의 삶과 분리되어, 교회를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변혁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탈정치화와 탈역사화로 이어지는 교회와 신학의 사사화(privatization)로 변질됐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즉 교회와 구원의 문제를 정치와 정치적 행동의 지평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개인 구원의 차원으로 축소하였다는 비판이다.

특히 서구에서는 종교의 간섭으로부터, 또는 종교 자체의 주체성을 찾으려 했던 정교분리의 노력은 19세기 이후 자유시장의 경제적 논리를 강조하는 정경 분리로 말미암아 이제 기독교의 역할은 정치뿐만이 아닌 경제정의의 문제 앞에서도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제정치와 시장경제의 영역에서 정치적 개입이나 유착 없이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요구하는 정경분리의 원칙은 과거 정치적 자유와 해방을 강조한 교회의 역할에 경제적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책임이 이중적으로 부과됐다.

 

 

2. 한국의 공공성과 교회: 하나님의 현실

 

한국에서 교회의 공공성은 정치적 근대화의 과정과 연관이 되어있다. 전통적으로는 조선시대 후기까지 왕정사회였기 때문에 공공성을 논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일제의 식민지 사회에서도 주권이 없는 상태에서 공공성이란 매우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체제에서 공공성이란 오히려 제국주의의 시민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통제의 기능이 강했기 때문이다.

6.25 전쟁이후 군부독재 체제까지 공적영역을 논하기는 매우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재정부에서 공공성이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이었고 생활세계의 식민화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즉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국민들의 생활영역은 철저하게 억압으로 유린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비록 근래 민주화에 의하여 한국 사회가 발전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한국 근대화의 과정에서 파생된 경제와 관료행정의 비대화는 자본과 권력을 여전히 무기로 삼고, 생활세계 내에서 국가와 국민들과의 의사소통 행위를 여전히 무력화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근대화 과정에서 목적으로 삼았던 국가권력 중심의 개발과 발전 전략에서 분배 정의의 문제가 한국 사회 내 주요 담론으로 부각되었음에도, 자신들의 욕구를 관철하려는 각 이익집단의 힘겨루기와 충돌은 끊이지 않고 있다. 현재는 민주화 시대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불안한 국가권력으로서의 체제의 힘은 시민 사이에 이성적인 담화 형성의 과정을 다원 다자적이기보다는 여전히 양극화의 구조로 만들어 가고 있다. 결국 체제와 생활세계의 관계의 불균형은 사회적으로 병리현상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사회통합을 분열하는 위기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 교회는 근대화 과정의 문제를 극복하는 변혁의 정신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에 직면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학은 일원론과 이원론의 입장을 가지고 세상의 문제를 설명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일원론은 분명한 목적과 의무를 강조하는 반면에, 이원론은 목적의 불가능성, 즉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없음에 대한 대안으로 현실주의와 같은 관점을 강조하게 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전통적인 일원론, 또는 이원론의 관점은 본래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윤리적으로 보면 그 답은 서로 같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원론의 경우 세상을 신의 주권아래 있는 세계관을 통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하지만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죽음이나 자연재해, 그리고 전쟁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문제가 생기면, 결국 보다 심오한 그 무엇이 있는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고 있다고 해석함으로써 자칫하면 운명론에 빠지게 된다. 한편, 이원론은 이 세계와 초월의 영역인 저 세상을 구분함으로써,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생기면, 이 땅에서는 그 답이 불가능하다고 인정하고 문제를 방기하게 되며, 결국 문제의 해결을 저 초월의 영역으로 돌려버린다.

이와 같이 운명론이나 초월의 영역으로 신앙의 문제를 돌리게 되면, 결국 마지막 남는 과제는 이 모든 사안이 인간이 해결해야만 하는 것으로 귀착되게 된다. 겉으로는 발생하는 문제들을 숙명적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만 결국 마지막 남는 행위의 주체는 인간이 되며, 한편 궁극적인 해답을 초월의 영역에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지만 그 과정에 인간은 마지막 보루인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물론 신앙이라는 믿음체계는 운명론이나 초월의 경우에 있어서 다 작용한다. 차이는 운명론의 경우 자칫 현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왜곡된 현실 자체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반대로 초월의 경우, 임시적인 인간의 양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절대화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기독교계시의 절대성을 강조한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급진적 유일신론이나 본회퍼와 같은 제자도의 신학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를 하지만, 크게 보면 이원론이나 일원론 모두 이 땅의 문제들에 대한 분명한 해결책은 제시하고 있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일원론과 이원론의 한계, 즉 마지막 남는 과제가 인간적인 것으로 변질하게 되는 인간의 문제는 종종 모호한 입장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땅의 문제는 삶, 범주, 또는 상황(context, praxis)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절대 배제되거나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 땅의 문제는 단순히 무엇이 올바른가?”라는 정의(definition)의 문제가 아니라, 범주를 생략하지 않고,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적 과정(process)에 대한 질문이 되어야 한다. 이 과정 안에서, 삶의 범주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우리가 중요시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지속적 과정으로서의 지금 발생하고 있는 현실(reality)’이다. 이 현실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생존하는 현재의 세계관에서 느끼는 자아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으며 그리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해석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현실은 자체가 그 방향을 스스로 정향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현실 자체가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하는 자연론적 세계관은 현실의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운명론적인 한계를 내포하며, 그렇다고 현실을 부정하고 미래의 세계관을 종말론적으로 받아들이면 지금 현실의 근거가 되는 자신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현실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지금 나의 현실을 이해하는 기준이 필요한데, 이것은 신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현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연관이 된다. 왜냐하면 이 질문이 가능해질 때 의 현실과 라는 개체의 현실에 대하여 분명한 이해를 할 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나의 현실은 윤리적으로 볼 때, 바로 내가 존재하는 것이며, 나의 존재를 규정해주는 사실들인 개체성의 또 다른 개념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적인 개념을 신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하여 볼 때, 하나님의 현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연관된다. 바로 이 문제를 성서는 창세기부터 일관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성서 전체에 걸쳐 신과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대답하고 있다. 특별히 성서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현실을 다루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육신(incarnation),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 다른 말로 하면, 역사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현실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현실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과 동시에 삶의 문제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역사 속에 속해 있는 현실에 대한 이해는 모호하게 내버려둔 채 모든 문제를 과거로 환원하거나 아니면 초월의 영역으로 돌리려 한다는 데에 있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이 역사 속에서 무엇인가?”라는 하나님의 현실은 역사 속에 들어오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즉 구체적인 하나님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신학적 인식이나 신앙의 표현은 적합성을 가지지 못하며 자신의 현실 또한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하나님이해가 전제된 신학과 더불어, 현실의 맥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신학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현실을 따라야 한다. 이 하나님의 현실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현실인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 종말론적 지평의 확장으로서 성령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결국 보편적이고 통전적이며 동시에 배타성과 특수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기독교 윤리의 지평은 철저히 삼위일체의 관계성을 통하여 이해되어져야 한다. ,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인간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지금도 진리의 영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신 성령과의 관계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에 대하여 올바른 해답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삼위일체 관계성은 특히 인류 역사를 주장해 온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과 관계 맺고, 우리 인간과 관계를 맺는 구체적인 삶의 범주 안에서 일어난 현실로 여전히 우리에게 진리가 되신다.

기독교 역사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현실로서의 공공성은 하나님의 실재로 파악하는 것이다. 기독교현실주의의 공공영역은 종말론적인 지평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완성을 보았다. 스탠리하우어워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덕적 이상을 계시된 도덕(revealed morality)로 보지 아니하고 계시된 실재(revealed reality)로 이해하였다. 하워드 요더 또한 누가복음 해석을 통하여 성서적 실재주의(biblical realism)를 강조한다. 이러한 신학적 지평은 교회와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아니하고 세상 한 가운데 있는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이제 살펴보겠지만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 그리고 루터는 각 시대에 나름 하나님의 현실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그리고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서 올바른 교회의 역할과 국가의 책임을 강조하였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올바른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게 고민하였다. 이들의 사상 가운데에서 공공성에 대하여 살펴봄으로서 한국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신앙의 사사화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3. 기독교의 공적 윤리

 

필자는 기독교 정치윤리의 관점에서 국가에 교회와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서 공공영역의 개념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전적인 측면에서 어거스틴(Augustine)과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그리고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개념들을 먼저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이 세 사람은 각각의 시기에 국가와 교회라는 맥락에서 공동체와 인간의 개념을 정리한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로 꼽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특히 어거스틴의 현실주의적 관점과 아퀴나스의 공동체 개념, 그리고 루터의 개혁주의 정신이 기독교 공공성을 살피며 공동체 정신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3.1 어거스틴

 

3.1.1 국가와 종교

 

현재 기독교의 국가 이해는 초기 플라톤(Plato)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국가개념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 철학자를 통하여 어거스틴(Augustine)과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국가와 교회와 같은 윤리적 요소들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지 않는 불변하는 원형을 이데아라고 불렀는데, 이 이데아는 이성에 의해서만 관찰되며 가시계의 모든 사물은 이데아의 모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데아의 실재에 도달하기 위한 철학적 통치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국가건설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철학에 의하여 학문적으로 인정되고 실천될 수 있는 최고의 덕에 의한 만인의 최고 행복이 그 목표이다. 플라톤은 그의 국가론(Republic)에서 나라를 통치하게 될 사람이 터득해야 할 가장 중요한 배움은 선(good)에 대한 이데아를 아는 것인데 이것이 가능하게 되려면 영혼을 통하여 바라보아야 한다고 보았고 이를 일종의 본(pattern)으로 삼아 올바른 처신으로 나라를 돌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플라톤은 선에 대한 이데아가 인식론과 존재론적인 근거라고 강조하면서도 국가론에서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부언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는 선의 이데아를 윤리학의 핵심으로 보았고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인간사회의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불변하는 선의 이데아를 강조한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사물의 속성에는 본성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국가관은 사람이 인간 본성에 의하여 발전시킨 최상의 기구로 드러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폴리스적인 동물이라고 보았던 그는 국가가 소수의 야망이나 다수의 욕구에 의하여 만들어 질 수 있는 산물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 속에서 나타나는 기본원리라고 보았다. 국가의 이상적 정치형태로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예를 들었던 폴리스(polis)는 결사체의 최고 형태로서 이것은 다른 결사체들을 통제하며 이 폴리스의 성원들에게 최고의 목적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폴리스는 자체의 내적 잠재성을 실현한 자연적인 것이다.

이 폴리스를 자연적 존재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물의 최종 형태가 항상 그것의 최종 목표이며 최선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폴리스는 최고의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고 보았다. 특히 인간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동물이기에 국가는 따라서 협동적인 질서를 만들며 그 구성원들은 덕을 실천하고 선한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입장에서 국가관은 인간의 본성에 따라 창출한 것으로서 인간공동체 생활을 위한 최상의 기구로 드러난다. 국가가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선 인간은 자연법이나 도덕법을 준수하여야 하는 것이며 국가는 주체가 되고 국민은 그 국가의 이념에 복종하여야 한다.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어거스틴의 국가관은 그의 고전적인 현실주의 입장을 통하여 잘 드러난다. 즉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이 죄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인간 세계의 무질서를 바로 잡기 위하여 국가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 어거스틴의 주장이다. 따라서 국가는 최소한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해야 할 임무가 있으며, 어떤 사회든 자기사랑의 정도가 지나칠 때 이를 시정시켜야 할 강제적 힘이 필요하다고 그는 보았다.

따라서 당시의 로마 제국은 지상의 국가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땅의 도성을 통치하는 제도가 된다. 어거스틴의 입장에서는 이세상의 어떤 것도 그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피조물 자체는 선하지만, 그것을 사랑하는 방법이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인간의 제도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거나 인간 본성에 흐르는 죄성과 타락이 치유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이미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상실한 상태이므로, 그들에게 무한정 임의의 선택을 허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어떤 형태의 제재적 수단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악은 그대로 방임할 수만은 없는 것으로 이를 통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국가관은 강한 종말적 역사의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역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역설적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리스인들이나 헤겔과 같이 국가 존재를 이상화하거나, 반문명주의자들이나 아나키스트들과 같이 국가 존재의 무용론을 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도의 최종목적을 종말의 지평에 설정함으로써 현실국가를 수용하는 융통성을 갖게 된 것이다.

어거스틴은 평화를 크게 둘로 나누고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 도성의 평화이며,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의 평화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평화는 인간의 오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범주에 속하며 이것은 궁극적인 신의 평화에 해당한다. 이 신의 평화는 완전하여 깨어질 수 없고 다만 인간은 그것을 부분적으로만 소유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영원히 지향하여야 할 평화를 이 천국의 평화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신국의 평화에 대응하는 개념인 지상의 평화는 신국의 평화를 반영한 것이지만 인간이 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부분적인 평화나 임시적인 평화의 속성만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지상에서 이룩할 수 있는 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의(), 상대적 질서일 수밖에 없다. 지상에서의 의는 선한 자들 뿐 만이 아니라 불의한 자들까지 포함하여 상대적인 평화를 유지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서의 평화는 임시적이다. 따라서 현세적인 질서는 불안정하며 신과의 참다운 관계를 통하여 회복될 수 있기 때문에 개별적이고 자율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3.1.2 공동체와 현실주의

 

어거스틴에게서 공동체(community)의 개념은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과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community of God's people)''세상에 속한 불경한 사람들의 공동체(community of the ungodly)' 나뉘어져 해석된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인간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어거스틴은 이 세상에서의 공동체는 높은 도덕성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보았다. , 이상적인 공동체의 사람이란 일반 어중이떠중이의 무리가 아니라 법에 대한 공동체적 인식과 이해관계로 공동체를 형성한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다. 동시에 이 사람들은 교회의 구성원이 되며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도성에서는 이 세상이 생산할 수 없는 영원한 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반면 이 세상의 공동체는 마치 노아의 홍수로 파괴된 것과 마찬가지로 멸망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없어진 다음에도 영원히 살 수 있는 공동체를 평화의 확신 속에 약속 받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멸망을 받는 것이다. 정의와 도덕을 추구한 들 그 가치가 세상에 속하여 있는 한 개인에 의하여 구성되는 공동체도 같은 파멸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기독교 현실주의가 정치를 이해하는데 제시하여주는 통찰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정치 현상은 인간의 본성에 뿌리를 두었다는 관점이다. 특히 인간의 죄성은 개인과 공동체의 이익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며 인간은 제도의 이면 속에 숨어서 그 탐욕을 극대화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현실주의는 오히려 인간의 냉철한 이성과 실제적인 경험이라는 이중의 검증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정치적 현실주의는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속성뿐만이 아니라 그 정치적 행동을 결정하는 이익은 철저히 당시의 정치 문화적인 상황에 의존하기 때문에 제도와 권력은 지극히 역사적 산물로 규정된다는 점이다. 이는 기독교가 현실의 정치적 가치와 제도가 추구하는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분쇄하며 초월적인 영역의 도덕성을 통하여 현실을 개혁하여 나갈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될 수 있다.

셋째, 정치적 현실주의는 정치적 행위의 윤리적 중요성을 인식하며, 동시에 윤리적 명령과 성공적인 정치 행위의 요구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긴장에 대하여도 잘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적 현실주의는 정치적 행위의 동기와 결과에 대하여 낙관주의로 치우치지 않으며 변증법적으로 그 긴장을 돌파하여 나갈 수 있다. 이는 제도나 공동체, 그리고 국가의 윤리적 열망과 보편적인 윤리 법칙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며, 특정 민족주의의 이익을 신의 뜻과 부합시키려는 무모한 시도에 대하여 경고한다.

이와 같은 현실주의는 한국의 공공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권력의 속성과 권력의 분권에 개입하여 이익을 보려는 개인과 정권, 그리고 이 이익을 통하여 반사이익에 집착하는 대중의 속성을 분명하게 판단케 하는 유익이 있다. 따라서 그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절대화 하지 않으면서도 개인과 공동체를 넘어서 더 합리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비전을 제공한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화 이면에 있는 권력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올바른 교회의 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기독교 현실주의적 관점은 매우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3.2 토마스 아퀴나스

 

3.2.1 국가와 종교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인간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인간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라고 보았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국가의 존재이유는 인간의 타락으로 정치적인 권위를 통하여 인간의 나쁜 성향을 억제하고, 사회적 범죄를 예방하고 처벌하기 위하여 강제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어거스틴이 지상의 국가에서 인간의 욕망의 죄를 다스리기 위해 국가와 법을 필요로 본 것에 반하여, 아퀴나스는 자연법사상에 기초하여 국가를 인간의 사회적 속성으로 인해 형성되는 자연스런 인간의 소산물 중의 하나로 보았다.

아퀴나스는 그의 국가 정치철학의 이론에 있어서 두 가지 주요 원천을 사용한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근거한 정부 개념이다. 이 두 가지 내용의 결합은 교회와 국가가 어떻게 지상에서 평화를 추구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에 대하여 방법을 제시하여 준다. 이 두 영역은 어느 하나가 또 다른 하나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도록 각 영역이 서로의 독특한 역할을 인정해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교회의 주요 기능은 인간의 영적인 삶을 강화시켜 주어 미래의 삶에서 신과의 결합을 통하여 지복의 평화를 제시하여 준다. 반면 국가는 지상의 삶에서 공동체적인 인간관계를 다루는 교회가 지복의 평화를 이룩하도록 돕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국가가 자연적인 제도로서 국가는 스스로에게 고유한 기능을 행사하면서 교회와 공존한다고 보았다. 국가의 기능은 국내 평화의 보호와 공동체의 방어, 시민의 도덕적 복지 추진과 물질적인 필요 공급에 있다. 국가는 물질적 및 지상적 사역에 관여하고, 교회는 국가의 기능을 능가하는 인간의 초자연적인, 초현세적인 목적을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국가와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법아래 있으며 인간을 위하여 나란히 존재하는 제도들인 것이다. 공동이익의 옹호아래에서 행동하는 국가는 사람의 현세적 요구들을 돌보며 교회는 영원한 도구들을 돌본다. 따라서 정치적 조직체 곧 국가를 위해 행복을 만들고 보전하는 행위들은 정당하다.

국가의 기능을 선한 삶의 추진자요, 공익의 보존자로 보게 될 때 공동체적인 선을 위한 대리적 의미에서 군주의 입법권 역시 정당하다고 아퀴나스는 보았다. 그러나 국가가 세속적인 일에 대하여 최상의 권위를 가지는 데 반해, 교회의 권위는 국가의 그것을 능가하는 초자연적, 초현세적 목적을 위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렇게 이해된 국가는 신적인 근거를 가지는 동시에 인간의 죄의 결과의 한 표징이었다. 따라서 국가의 기능은 교회가 지니고 있는 성의 영역에는 들어갈 수 없다.

인간에게 최대한으로 이득이 되는 정부 형태에 관하여 아퀴나스는 가장 좋은 형태로는 군주제를 선호하고 가장 나쁜 형태로는 전주제의 형태인 참주제를 들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군주제도 참주제로 타락할 수 있으며 그러한 경우에 국민들이 그들의 정부를 뒤엎고 그 대신에 좀 더 합당한 정부를 세우는 것이 적합하고 올바르다고 아퀴나스는 인정하였다. 따라서 아퀴나스는 국가나 군주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 절대적인 것으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비록 국가는 세속적인 일에 대하여 최상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만일 정치 권력자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자연법적 원리를 위배한 경우에는 이를 폭군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3.2.2 공동선과 정의, 그리고 덕의 윤리

 

아퀴나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며 이 또한 창조주가 허락하신 본성이기 때문에 사회적 생활은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공동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하기 위하여서는 공동선에 대하여 책임과 의무가 필요하다. 아퀴나스가 증명하려한 신의 문제에서와 같이 첫째 동인(first mover)이 하나님이라고 할 때 인간은 그 선의 의지를 은총으로 선물 받았으며 공동선(common good)’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다. 한 인간이 개인적으로는 부족할 수 있지만 온전한 공동체의 일부가 되며 인간에게 주신 이성을 통하여 더 큰 행복을 추구하며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연법의 법칙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선을 향한 의지가 인간의 타락으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신적 이성을 통하여 인간 개인으로 구성된 더 온전한 공동체인 국가를 제정하시는 것이다. 아울러 이 국가의 책임은 통치자에게 부여되지만 인간법은 시민 공동체를 위하여 필요하게 되며 정의를 구성하는 필수 요인이 된다.

아퀴나스는 국가와 개인을 공동선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연적 질서 내에서 종합적으로 인식한다. 국가는 바로 공동의 선을 책임지는 제도로서 당위성을 가지게 된다. “국가란 법에 대한 합의와 복지 공동체를 향한 일념으로 하나 된 인간들로 구성된 일종의 연합체이다(a nation is a body of men united together by consent to the law and by community of welfare).” 자연이 동물들에게 자연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만 인간에게는 자연의 환경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이 동물과 비교하여 부족한 대신 이성이 주어졌고, 인간은 이성에 의하여 개인 보다는 공동체적인 노력으로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공동체를 구성하며 경제적, 육체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보다 조직적인 사회(국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국가는 인간에게 자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아퀴나스는 이해하였다. 즉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신의 섭리이며 국가 역시 신의 뜻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자 동시에 공동체적인 존재로서 국가의 제도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의 목적으로서의 공동의 선사상은 인간이 선량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동의 복지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따라서 사회의 목적은 공동선이며, 개개인의 이익에만 근거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추구하는 이익의 총화도 아니다. “공동선이란 하나의 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신적인 것이므로 공동선이 개인적인 선보다 더 좋은 것이다.

이와 같은 공동선 개념에 근거한 아퀴나스의 국가이해는 국가의 기원을 신의 창조로 보는 점에서 그 특징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세상의 우주적 질서의 창조자이며 세상의 통치자이시기 때문이다. 국가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의 창조에 기인하며 국가는 신이 부여한 기능을 소유하게 된다. 국가는 합법적인 기능을 가지지만 교회에 속한 영역도 관리하고 있다. 국가는 자신의 영역 내에서 자치적인 권한을 갖는다. 그러나 생활권 내에서 인간의 초자연적 목적에 관계되는 종교생활에 관한 한, 국가는 인간의 신앙을 방해하는 어떠한 기제도 가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아퀴나스는 개인과 국가는 정의를 구성하며 이 정의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정의 개념이 아닌 사물과 인간 사이의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교환적 정의(commutative justice)’를 이루어야 한다는 근대적 개념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아퀴나스는 정의 또한 신적 정의를 출발로 하는 자연적 정의(natural justice, original justice)’라고 보았으며 공동의 선을 위하여서는 법적 정의(legal justice)’를 그리고 모든 시민들에게는 일반적 정의(general justice)’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아울러 정의를 위하여 정의의 덕이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이는 각자에게 자신의 권리를 돌려주려고 하는 의지의 습성인 것이다.

법적 정의란 사회의 공동선과 목표를 위하여 사회에서 책임을 마땅히 져야 하는 정의이다. 분배적 정의란 합당한 존재의 마땅한 행위에 비례하여 공정하게 분배하는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환적 정의란 상호관계의 맥락에서 개인과 집단들 사이에 평등을 기초로 하는 정의이다. 분배적 정의를 연산하면 등비비례와 같이 6/43/2와 같은 경우가 되어 비록 산술적인 차이는 있지만 개인의 능력에 합당하게 분배하는 정의이다. 산술적 평균과 같은 이치인 교환적 정의의 예는 564의 중간으로서 64의 중간인 5를 나누어 줌으로서 서로 평균이 되도록 하는 정의이다.

이와 같은 아퀴나스의 덕의 윤리와 정의개념은 정치적 공공성의 발전에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 모든 존재는 정체되어 있지 아니하고 현실 속에 잠재적 가능태를 가졌다고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아퀴나스는 궁극적인 운동의 동인으로 나아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이성의 지성적 능력과 덕의 도덕적 능력을 강조하였다. 특히 실천적인 반복을 통하여 인식의 능력을 함양하고 그 능력이 각자에게 분배와 교환의 정의를 통하여 발휘되며, 올바른 판단의 반복을 통하여 선한 사람과 공동체를 지향하였던 아퀴나스의 윤리는 공공성을 확립하는데 있어서 기독교적인 가치관으로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

자유로운 정치적 결정과 권력의 분산이라는 이념형적 가치의 소중함이 중요한 만큼 이를 수행할 수 있는 개인의 도덕적 자질과 이를 훈련하는 사회적 체계, 그리고 공동체의 질서와 조화는 공공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필수적이다. 올바른 민주화를 통한 공공성의 확립이 국가 권력의 분권으로 개인의 자유를 신장하는 사회적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내면적인 삶의 원리로서의 시민적 성품과, 사회적 질서를 구현하여 정의로운 법을 구성하고 그 법의 안정성 확보는 필수적이다.

우리가 직시하는바 한국은 아직 이러한 체계를 성숙하게 구현하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한국의 민주화를 통한 기독교 공동체 정신의 공헌은 이성을 통한 시민적 정신의 함양과 법의 질서를 수호하는 공공성의 회복에 있다. 이는 아퀴나스가 도덕적 의무를 자연적인 질서의 핵심으로 보고 보다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를 제시한 것처럼 기독교도 정치의 합리적 제도를 질서의 차원에서 회복하여야 할 공동선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국가가 공동체로서 공공의 복지와 정의를 수립하여야 하는 책임이 있는 한,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도 그 원리를 하나님의 주신 자연적 질서 속에서 올바른 도덕과 외적 법의 정신으로 실현하여야 할 책임을 절감할 때 공적영역은 책임적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3.3 마틴 루터

 

3.3.1 국가와 종교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모든 권력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교권의 남용과 교회의 경제적 타락을 신앙의 양심을 가지고 예언자적인 지평에서 고발하였으며 당시 경제와 정치적 부패를 고발하는 시대정신과 결합하여 많은 지지층을 확보하였던 기독교운동을 전개하였다. 종교개혁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선행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 질 수 있다는 하나님 중심의 정신에 근거한다. 따라서 당시의 절대적인 교황 독점권을 철폐하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자유를 강조한 이러한 종교개혁정신은 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아무런 방해가 없이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는 만인사제라는 측면에서도 많이 부각되었다.

루터의 국가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어거스틴의 고전적 현실주의를 넘어선다. 초기에 루터는 정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에 저항 받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지만 이러한 입장은 통치자들의 권력이 무제한적이고 그들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루터는 세속 권력에 대한 분명한 제한을 설정하였다. , 통치자는 하나님을 향해서는 참된 신뢰와 진지한 기도가 있어야 하며, 시민을 향해서는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봉사가 있어야 하고, 보좌관과 관리들에 관해서 자유로운 판단과 이성을 지녀야 하고, 그리고 악행자들에 대해서는 절도 있는 엄정함과 확고함을 나타내야 한다고 보았다.

루터에 의하면 세속 권력자들의 권력은 순전히 현세적인 것이다. 그것은 단지 이 땅에서의 인간의 삶과 재산에만 관여를 하며, 인간 영혼에 관해서는 어떠한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세속 권력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어떤 것을 명령하거나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을 포함하는 어떤 것을 명령한다면 복종하지 말아야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력으로 저항해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루터는 아주 확고하게 그리스도인들의 반대는 복종을 보류하는 것으로서 세속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억압하면 고통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식으로 루터는 무저항의 교리를 가르쳤다.

이러한 루터의 사상은 종말론과 관련하여 그의 무정부에 대한 두려움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죄된 본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세상 정부의 억제가 없다면 인간들은 자연의 상태로 퇴보할 수 있다고 루터는 확신 했기에 반란을 가능한 죄들 중 가장 나쁜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반란은 정부를 전복하고 위협하여 세상의 온갖 죄들(살인, 유혈 사태, 강간, 약탈 등)에 대한 길을 열어 놓기 때문이다.

루터의 세속 권력에 대한 입장은 변화를 가지게 되는데 루터는 하나님께 순종을 위로 두고 권세에 굴복은 아래에 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루터는 보통 때는 권세에 대한 복종을 주장하다가 자기가 하나님의 진리라고 믿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강조한다. 1531년 루터는 종교개혁을 탄압하는 황제에 대해 조심스럽게 저항할 것을 권했다. 이것은 자기 방어로서의 저항을 인정한 것으로 정당성의 규명을 법률가들에게 맡겨 폭력에는 계속 부정적인 입장이며 신학적 인정이 아닌 상황적, 법률적 인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3.3.2 만인사제설과 믿음

 

사실 루터의 정치사상의 핵심은 개인에 있기보다는 참된 교회와 올바른 성도의 교제에 있었다. ‘모든 신앙인은 그 자신의 사제라는 만인 사제설의 개인주의적인 차원은 모든 신앙인이 그 이웃의 사제라는 뜻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 모든 사람은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신의 사제가 아니라 그의 이웃의 사제로서의 사제이다. 따라서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제이며,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안에서의 삶이고, 성도의 교제로서의 삶인 것이다. 신약 성서의 교회가 성도의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였던 것처럼 종교 개혁 또한 기독교인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와 연관하여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 역설하였다. 루터가 말하는 믿음이란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를 향한 자신의 변화이며 사회에 대한 책임이었다. 그의 정의에 의하면 믿음이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에 따른 변화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살아있고 창조적이며 활동적이고 힘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신앙인으로 하여금 선한 일 들을 계속적으로 지속하게 한다.

그러나 믿음은 누가 이 선한 일을 해야 될 것이냐고 묻지 않고, 오히려 누가 묻기 전에 선한 일들을 자신이 능동적으로 쉬지 않고 하는 것이다. 루터는 누구든지 이러한 적극적인 자세로 선한 일을 하지 않으면 불신자와 같다고 지적하였다. 많은 말로 믿음과 선행에 대하여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수천 번을 죽게 되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로 인도된다.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는 신앙을 통하여 드러나며 이 신앙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은 세속적인 노력에 의하여 가능하지 않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이다.

루터가 진심으로 원하였던 공동체는 이러한 종교 개혁적 신앙에 근거하여 형성하는 공동체이다. 물론 그의 주된 관심은 당시의 가톨릭의 교황권에 저항하여 참된 믿음에 근거한 공동체이었다. 모든 것이 평등하되 공동체의 소망과 권고 없이 함부로 침탈되어서는 안 되는 그런 권리가 보장되는 만인사제설적 유기적인 맥락에서의 공동체이다. 자신의 직임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서 최선을 다하되 그 소명에 질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여타의 공동체 성원에게 유익이 되며 모든 직임이 조화롭게 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간다. 이는 마치 몸의 지체가 연합을 이루어 한 몸을 이루는 원리와 같은 것이다.

루터는 확신하기를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결국 모든 사람을 섬기고 모든 일을 감수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루터는 불에서 빛과 열을 분리할 수 없듯이, 기독교인의 믿음과 선행을 분리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바른 교회는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교회 안의 것과 밖의 것으로 구분 할 수 없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의 신앙은 개인이나 교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의 사제로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필자의 관점에서 루터의 정치사상은 우리에게 신앙적 양심의 저항권과 직업 소명설, 믿음과 행위의 연속성, 그리고 국가와 교회의 정치적 협력을 추구한 면에서 공공성에 대한 정치신학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도성과 세계의 도성이 결국은 나눠질 것이라는 어거스틴의 고전적 현실주의를 넘어서 사랑과 검의 조화를 추구한 루터는 교회는 봉사를 그리고 통치자는 건강한 이성과 양심의 판단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필자는 루터의 신앙적인 양심은 현실에서 단순히 내면적 세계의 양심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양심실현의 자유와 반드시 연결하여 해석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참고로 우리나라 헌법 제19조의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에서 양심의 자유는 크게 양심형성의 내부영역과 형성된 양심을 실현하는 외부영역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내심의 자유인 양심형성의 자유와 양심적 결정을 외부로 표현하고 실현하는 양심실현의 자유이다. “양심형성의 자유란 외부로부터의 부당한 간섭이나 강제를 받지 않고 개인의 내심영역에서 양심을 형성하고 양심상의 결정을 내리는 자유를 말하고, 양심실현의 자유란 형성된 양심을 외부로 표명하고 양심에 따라 삶을 형성할 자유, 구체적으로는 양심을 표명하거나 또는 양심을 표명하도록 강요받지 아니할 자유(양심표명의 자유),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강요받지 아니할 자유(부작위에 의한 양심실현의 자유), 양심에 따른 행동을 할 자유(작위에 의한 양심실현의 자유)를 모두 포함한다.”

현실 국가에서 입법자는 평등의 차원에서 헌법의 다양한 가치와 상이한 문제들을 조화롭게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개인의 양심을 보호하여야 한다. 또한 입법자는 국가발전의 분명한 목적 안에서 수단의 적합성, 최소침해성, 그리고 비례의 원칙을 고려하되 공익과 공공의 선을 위하여 법을 집행할 분명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

이와 연관하여 종교적 양심은 종교적 목적의 행위와 국가의 질서와 법의 안정성 안에서 양심실현의 자유와 불가분의 관계이며 절대기본권이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 양심의 실현은 양심이 내면적으로 형성되는 기층 사회의 정치 사회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인격실현을 위하여 사회적 책무와 반드시 연관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루터의 만인사제설은 세속적 직업인이나 교회의 성직이나 다 같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세워주신 질서를 책임진 사명자들임을 확인하여 준다. 하나님이 세우신 정부의 관리들이나 사제의 직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사제나 감독, 그리고 교황이라고 할지라도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정부의 관리가 자신들의 일을 감당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머리되시며 모든 크리스천들은 주님이 주시는 직무를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감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제는 기독교왕국의 관리로 임명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섬기기 위한 직무를 감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루터의 만인사제설은 교회와 사회의 책임과 그 역할에 대한 교회의 정치 신학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루터가 강조한 양심의 저항은 올바른 공공성의 확립에 대한 개혁적 정신에 대한 단초가 될 수 있다. 루터는 당시 가톨릭의 체제 안에서 양심의 소리에 침묵하지 않았다. 그의 교황에 대한 저항권은 비록 검이 아닌 펜의 저항이었지만 믿음을 통하여 평화주의를 추구하면서 인간 본성의 변화와 체제의 개혁을 바랐던 루터의 신앙은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모든 가치들을 완벽하게 지배하지는 못하며 그 어떤 가치도 결코 완벽할 수는 없다. 사회의 그 어떤 지배적 가치라고 할지라도 언제나 권력에 의하여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에 각 가치들은 항상 공공 목적들을 위한 것으로 발전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올바른 공유 형식과 분배 형식, 그리고 교환 형식에 관한 실질적인 사회 제도들이 먼저 구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책무는 국가가 입법화하려는 어떤 사안들에 대하여 법의 목적과 공공선의 실현에 부합하는지 문제를 깊게 살피며 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영적인 각성과 예언자적 정신이 항상 필요하다.

 

 

4. 결론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과 땅의 도성이 궁극적으로는 나뉠 것으로 보았지만, 평화를 명목으로 이 땅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의 상대적인 권위를 허용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법사상을 통해 하나님을 현 역사의 주권자로 회복시키려고 시도했지만, 기층 사회질서 내 국가의 상대적 주권을 하나님의 주권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고, 마틴 루터 또한 종교개혁에 필요한 종교적 권위(authority)’에 세속적 정부가 제공하는 권력(power)’의 필요성을 허용하고 말았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지상의 국가는 천상국가의 순례의 여정으로 가는 임시적인 것으로 파악하였고 심지어 악과 전쟁까지도 그것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질서 속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전적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지상의 질서를 최고의 것으로 보지 아니하면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며 인간과 공동체의 죄성을 이해할 수 있는 통찰력을 그는 주었다.

아퀴나스는 국가를 사회성을 가진 인간의 공동선을 위한 역사로 보았기 때문에 국가는 하나님이 주신 이성으로 인간의 행복과 평화를 추구할 수 있는 신의 권위가 부여된 현세적인 질서이다. 이 국가는 교회와 함께 인간의 자연적인 욕구와 초자연적인 요구를 둘 다 충족하며 천상의 선한 의지로 공동체 성원을 인도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공동체를 위하여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며 이 정의의 과정에 훈련된 덕의 성품이 요청된다.

거룩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이 교차하던 아퀴나스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교회는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설명해야만 했다. 아퀴나스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성과 속의 이원적 구조를 인정하고 성의 우월을 확고히 하면서도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아퀴나스의 국가론은 기독교의 초월성과 동시에 현세적 지침을 제시하는 효용성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루터는 통치자에 대한 무력 사용을 절대 금지한 초기의 입장에서 후기에는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자기 방어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데로 나아갔다. 그의 사상에는 기독교 국가개념에 있어서 최초로 근대적인 저항 의식이 대두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며 이는 후에 민주주의의 기본 의식으로 발전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우리가 공공성의 확립을 통하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겪는 많은 어려움은 반드시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정치는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정치가 여전히 매력적인 이유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공공성이란 유산 안에는 바로 이상적인 사회, 이상, 그리고 도덕성의 개발을 통한 인류와 공동체의 발전이라는 비전이 담겨져 있다.

우리는 그러한 유토피아의 실체와 허구를 파악하고 정치를 절대화하거나 정치를 불필요하게 보는 입장에서 벗어나 정치의 허위의식을 벗기고 변증법적으로 현실세계를 개혁하며 나아가는 해방적 영성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적 영성은 정치의 책략이 아닌 그 책략을 결정하는 인간의 동기에 대하여 냉철하게 질문하는 것이며, 질서를 강조하는 이면 속에 숨겨진 기득권을 향한 인간의 욕구를 고발하는 것이며, 비도덕적인 자신의 약점을 더 큰 비도덕적인 형태의 조직 속에 숨기려 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깨어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현실로서의 통치방식에 대하여 여전히 믿음을 필요로 한다. 이는 현실 정치의 낙관주의나 이상주의에 기대자는 뜻이 아니라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고민한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 그리고 루터의 그 고민에 함께 동참하자는 뜻이다. 이들은 모두 역사가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으며 종말론적인 지평에서 때로는 현실 역사적 지평에서 하나님의 활동하심을 믿고 새 공동체와 새로운 피조물의 환상을 보았다.

이러한 역사 이해는 기독교정치윤리에 있어서도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실 정치에서 민주와 자유의 이상을 구현하며 나아가 덕의 윤리에 기반 한 공동체의 가능성, 그것은 꿈이 아니라 우리가 역사 속에 활동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실현하여야 할 책무가 아닐까? 양심은 내재적 신념이 아니라 양심 실현의 자유까지 연결시켜야 진정한 양심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내재적 신앙이 아니라 그 믿음을 실현하는 신앙 실현의 실까지 나아갈 때 한국 정치현실에서 직면한 교회의 공공성의 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해결하여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