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폭력

 

 

종교와 폭력의 잘못된 만남

 

지난 1월 초 프랑스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에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습격하여 잔혹한 테러에 의하여 많은 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슬람국가(Islamic State)에 의하여 억류되어있었던 일본인 인질 두 명이 참수되어 전 세계를 테러의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이와 같이 테러가 발생하는 이유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는데 필자는 이 지면을 통하여 종교와 폭력에 대한 종교심리적 요인과 경제정치적 요인을 살피고, 그리고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종교의 역할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변화라고 표현하고 싶다. 종교는 개인의 정신혁명을 통하여 어려움에 처하여 있는 공동체를 바른길로 인도하며 역사의 변화를 이끌었다. 인류역사 속에서 종교가 제 역할을 할 때는 종교는 대부분 박해를 받는 입장에 있었다. 종교는 칼을 선택하지 않고 붓과 펜을 선택하였으며 인간의 양심을 돌려 세속적 가치보다는 초월의 영역에 관심을 가지도록 인도하였다. 굳이 타종교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기독교의 경우도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소외된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으며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통하여 천국이 있음을 알려주셨다.

종교의 또 다른 특징은 보편성에 있다. 보편성은 개인의 이기심과 사욕을 떨쳐버리고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게 하는 원리이다. 온 천하보다도 한 생명이 더 귀한 것이 종교의 자명한 이치며 우리 기독교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임을 중시한다. 이 보편성은 황금률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종교는 이 땅에서 권력을 지향하지 아니하고 낮은 곳을 향하게 되어있다. 낮은 곳이란 대부분 사회체제 속에서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말하며 잘못된 권력체제는 어차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등골을 뽑으면서 유지되기 때문에 종교가 이들의 편을 들면 종교와 종교지도자에 대한 박해와 추방이 일어나는 것이다.

종교가 폭력을 만나는 첫 번째 시점이 바로 여기이다. 소외된 이들의 편을 드는 종교와 이를 무력으로 제압하려는 권력이 부딪치게 되면 종교는 기독교의 경우처럼 비폭력무저항주의를 통하여 이를 극복한다. 무저항주의는 약자의 변명이 아니라 상대방의 폭력을 몸으로 막아 더 이상 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비폭력으로 견디는 숭고한 정신이다. 이러한 비폭력무저항주의를 개량주의적으로 변용한 것이 기독교현실주의이다. 이 개념은 최소한의 무력으로 폭력을 저항하는 것이다.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전쟁에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정당전쟁론이 이 경우이다. 이 현실주의는 약자들의 연대를 전제하며 국제사회에서도 약소국가들의 협력을 요구한다. 오로지 평화를 위한 무력만 허용하지만 초기부터 폭력이 개입되기 때문에 비판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종교가 폭력을 만나는 두 번째 경우는 거꾸로 종교가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초기에 종교지도자를 중심으로 경건과 무소유를 통하여 자생적인 소규모 공동체를 형성하지만 규모가 커지게 되며 교파를 구성하고 기층의 정치 경제 체제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교파 자체의 유지를 위하여 교리가 강화되며 교권이 형성되는데 그 영향력은 기독교 역사의 경우 황제의 권력과 버금가는 종교권력이 형성하기도 하였으며 그 권력의 남용에 반발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종교의 권력은 십자군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고 교리에 어긋나면 화형이나 참수형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종교가 폭력을 만나는 세 번째 경우는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족주의와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역사의 종말>의 저자인 푸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지난 9.11 테러 사건과 연관하여 의미심장한 분석을 한 바 있다. 그가 말하는 종말이란 개념은 현대적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중심의 자본주의가 최종 단계에 이르렀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 개념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하나는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들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개념을 통하여 세계로 확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자칫 이러한 동향이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열차와 같아서 서구사회의 가치개념에 대한 저항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현대의 민주주의는 기독교의 보편성에서 종교성을 분리한 가치개념으로서 결국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기독교의 가치개념은 유기적으로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화의 추세가 저항을 받는 이면에는 보편성의 필수요소인 인간을 중시하는 시민성의 신장보다는 거대자본의 상품과 저가노동의 유통만 강화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 정신의 세계화와 교류가 아닌 서구를 중심으로 한 상품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현대 국제사회에서 벌어지는 종교폭력에는 자본과 노동, 그리고 상품의 세계화를 둘러싼 북반구와 남반구, 선진국 위주의 서구와 그 외 주변부 국가들과 민족, 기독교와 그 외 종교의 형식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소비자의 선택을 세계화하라!”라는 구호에 매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계 어디에 있던지 시장의 자유선택에 의하여 높은 삶의 질을 나누자고 하는데 현혹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소비자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면 민주적 시민질서도 약화되고 원래 종교가 수행하였던 인간의 가치개념이 수단으로 변질되어가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세계화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에 대하여 폭력이 양산될 때 과연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하여야 할지 그 책임이 중요한 것이다.

종교라고 쓰고 폭력이라고 말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현대 국제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에 종교가 얼마나 개입되어 있는가는 복합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먼저 특정 종교성의 가치개념에 폭력적 요소가 있는지, 폭력을 유발하는 정치 경제적 요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폭력이 자행될 때 그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폭력에 개입된 사람들의 인성과 이성적 합리성과 같은 점들이 면밀하게 검토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슬람국가(IS)의 테러 경우, 유대교와 이슬람의 종교성과 반유대주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연결된 서구 기독교국가의 역할, 중동의 석유자원 확보를 위한 열강들의 쟁투, 신자유주의 확산에 의한 제3세계의 경제위기 등이 심층적으로 분석이 되어야 한다.

필자는 이와 같은 논지는 거대담론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종교가 폭력을 유발하는 종교 문화 심리적 측면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만일 종교가 폭력에 개입한다면 이는 종교적 확신이 개입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선은 자신이 종교적 신념이 위협받는 상황이 설정된다.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에 심각한 문제가 되는 어떤 신뢰의 위기가 발생할 경우 현상 세계를 그렇게 만드는 특정한 적이 사탄으로 지목되며 그리고 신뢰의 위기를 겪는 사람이나 종교단체에게는 의지할 수단으로 폭력적 매개물이 주변에 있어야 한다.

둘째, 종교적인 테러는 눈앞의 현상을 넘어서 또 다른 것을 가리키는 상징세계를 가진다. 따라서 폭력에 개입하다가 희생이 되어도 내세에 보상받는 순교가 되며 자신에게 영광이 되기 때문에 종교폭력은 일반 정치적 테러리즘과 그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정치테러의 경우 정적이 제거되면 되지만 종교폭력의 경우는 정적의 제거와 상관없이 폭력을 허용한 신적 계시의 문제를 더 중요시 한다.

셋째, 종교적 신념이 극대화 될 때는 소위 모든 폭력은 우주적 전쟁으로 귀결된다. 즉 적을 물리쳐야 할 영적 전쟁 상황에 있고 그 수단이 폭력 외에는 없기 때문에 그 어떤 종류의 폭력도 정당화 될 수 있다. 이때 폭력은 잔인성을 띠게 되며 성과 연령 그리고 가족 관계도 깨어지며 오로지 최종 승리만이 목표가 된다. 종교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지만 현상을 무질서로 보기 때문에 폭력을 통하여 질서대로 원상을 복구하는 방식은 계속 허용된다.

넷째, 종교적 폭력은 그 대상이 개인이 되기도 하며 국가, 이념, 단체 등 상대를 불문한다. 시행하려는 종교적 폭력에 반대하는 세력이 나타나는 경우 돌파하는 방법은 둘 중 하나이다. 하나는 상대의 세력이 더 큰 경우는 희생을 감수하는 고난과 자발적인 고통으로 승화하며 종교폭력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게 되면 신의 뜻으로 돌린다.

다섯째, 대부분의 종교적 폭력은 시작 초기부터 신적계시로 수행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영적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생각은 아예 배제한다. 그러나 만일 현실적 조건에서 종교폭력으로도 소위 현상의 무질서가 개선될 여지가 없으면 초기의 종교적 확신은 다시 지연되고 새로운 계시를 기다리며 또 다른 폭력을 준비하게 된다.

지금까지 필자가 분석한 종교폭력의 유형은 일반적이기 때문에 이것을 공식화할 수는 없지만 종교심리학적 맥락에서 어느 정도는 적용이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종교의 역사에서 그리고 현대 국제사회에서 종교적 가치개념이 개입된 특정 폭력이 계속되는 이유는 폭력의 대상화에 영적 상징세계가 개입되며 신적 질서를 세워야 한다는 소명과 연관이 되기 때문에 이 폭력을 달리 막을 방도가 없다. 그렇다면 과연 작게는 소규모 섹트나 대규모 국제 사회에서의 벌어지는 종교폭력을 방지할 대안이 인류사회에 없다는 것인가!

 

종교는 종교로 돌아가야 한다!

 

필자가 인류사회의 평화를 위하여 있어서는 안 될 종교폭력 문제에 대하여 제시하고자 하는 대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제사회에서의 종교와 정치세력간 초당적 소통이 요구된다. 인류역사가 그나마 현재의 국제 질서를 유지하여 온 이면에는 민주와 평등, 그리고 자유라는 고귀한 가치를 위하여 노력한 결과이다. 물론 그 수준이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국제사회는 폭력을 중재할 UN과 같은 기구도 있으며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수많은 단체들이 있다. 따라서 현재 국제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슬람과 비이슬람권의 분쟁으로 비쳐지는 종교간의 갈등을 중재하여야 하는 비상한 노력이 요구된다. 특히 앞에서도 강조한바 서구적 민주주의 이념과 자본주의 그리고 기독교의 연대로 비쳐지는 세계화의 흐름이 제3세계나 비기독교국가들에게 폭거로 비쳐지지 않도록 보다 현명한 국제정치적 소통이 필요하다고 본다.

둘째, 문화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로 인간을 전락시키는 현 시대의 소비문명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급작스런 기후의 변화와 생태계의 파괴는 모두 잘못된 소비문명의 결과이다. 세상이 신음하고 고통당하는 현실에서 소비의 욕망은 다다를 수 없는 바벨탑처럼 높아만 가고 있다.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소비의 수단으로 바뀐 현실에서 인간의 정신도 일회용처럼 소비되어 버려지고 있다. 특히 중동지역의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약육강식의 전쟁과 테러의 악순환을 중지시켜야 한다. 따라서 인류사회는 보다 냉정하게 현 무정부상태를 야기 시키는 국제사회의 종교적 분쟁의 원인에 대하여 자성하고 현 문명에 대한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셋째, 종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 만일 종교가 폭력에 의지하면 그것은 이미 종교가 아니라 이념이다. 즉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이념도 나름 고상한 목표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종교는 종교로 돌아가야 한다. 즉 종교 본연의 목표를 재설정하여야 한다고 본다. 종교는 정치적 권력이 아니라 정신적 권위로 세상을 선도하여야 한다. 종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복종하지 말고 종교 본연의 숭고한 정신에 헌신하여야 한다. 종교 간의 대화와 평화란 자신의 종교적 가치관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각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의 우주적 개념에 진작하면서 상대방의 입장을 들어주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란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양심의 자유와 연관이 된다. 그러나 이 자유는 내심의 자유로서 현실에서는 법과 윤리의 조건에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종교적 양심이 현실에서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하여서는 인류사회가 구축하여 온 공공질서 안에서의 민주적 절차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자유와 인권이 우선시되어야 하며, 그리고 정의를 신장하는 국가와 국제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 자유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적 신념이 정치적 이념을 통하여 빛을 발휘하는 경우는 바로 위의 공공의 영역에서 정당성을 인정받을 때이다. 스스로 폭력적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자기 독백이지 대화가 아니다.

폭력의 대안은 평화인 전통을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이어왔다. 그러나 현실의 국제정치에서 복잡한 정치경제적 요소와 결부된 종교적 폭력에 대한 대안은 올바른 종교와 올바른 권력의 형성에 있다고 본다. 종교지도자와 정치지도자의 이중적인 노력이 요청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종교는 종교로 돌아가고 정치는 정치 본연의 목적을 위하여 서로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인간 생명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이 여기는 종교, 그리고 그 하나밖에 없은 인간의 삶을 위하여 평등의 사회를 구축하려는 정치의 지혜가 힘을 합쳐서 보다 평화로운 사회가 건설되기를 바라며 주님께 기도한다. 우리 모두가 평화의 사도가 되게 하소서!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이 땅에 평화를 심는 자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소망한다. - 목회와 신학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