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1. 스탠리 하우어워스에 대한 전반적 사상 이해

   리처드 헤이스는 하우어워스의 사상에 대해 매우 다양한 영향을 절충주의식으로 종합한 신학자라고 규정한다. 하우어워스는 예일 대학교의 학생으로 있는 동안 한스 프라이(Hans Frei)로부터(궁극적으로는 칼 바르트로부터 나온) 복음을 제시하는 기본적이고 적절한 양식으로서 내러티브를 강조하는 것을 배워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하우어워스는 성품(character)과 덕(virture)의 윤리를 개발하기 위한 핵심인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노틀담에서 가르치는 동안에는, 존 하워드 요더의 연구를 발견하여 기독교 윤리학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예수님, 제자도의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지로서의 비폭력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향 하에 하우어워스의 윤리는 크게 공동체, 성품, 이야기로서 표현될 수 있다.

2. 주여 기도를 가쳐주소서 내용정리

1. 우리 아버지
➀ 우리의 하나님이 되기로 작정하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유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우리 하나님이 되시기로 작정
➁ 우리를 종의 위치에서 친구로 변화시켜 주셨다는 말이다.  
➂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셨다.(행2장)
➃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다.
‘우리 아버지’ 라는 의미는 우리 이전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
➄ 세상에 도전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를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됨. 세상의 기준으로 보자면 우리가 전혀 친구가 될 수 없는 이들과 함께 교회로 모이고, 그들을 ‘자매’, ‘형제’로 부를 수 있는 이유.

2. 하늘에 계신
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닌 우주적인 사건을 말한다.  
➁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통치 영역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 위치, 주소가 있다. 바로 하늘이다.
➂ 하나님을 자기 취향에 맞게 길들이려고 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경고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급기야 어떤 이들은 “사용자 편의 중심의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과 화기애애하고 편안한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 이것이 마치 기독교 신앙의 전부인 양 말하는 사람들의 말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➃ 하나님이 계신 위치를 분명히 하고 계심을 말한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갈망만큼이나 우리 자신에게 가까이 계실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➄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대단히 잘 조망하신다는 말이다.
➅ 성만찬 때 우리의 향연 식탁에는 우리 회중 뿐 아니라 예수의 부활로 인해 생겨난 그 거대한 회중까지 다 참여하는 것

3.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➀ 하나님이 인격적이고, 살아 계시고, 행동하시며, 이름을 가진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창조하시는 분, 우리는 은혜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것.
➁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기를 바라는 요청인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지 않겠다는 우리 편의 서약이다.
십자군 전쟁이나 잔인한 행위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식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남용하지 말라는 것.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소유도 우리 욕망의 소유도 아니다. 하나님의 소유다.

4. 나라가 임하옵시며
➀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라고 초청하신 것이다.
➁ 예수를 믿는 신앙이 단순히 어떤 관념이나 감정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신앙은 우리가 참여해야 하는 구체적인 실재를 말한다.
➂ 낯선 사람들의 모임, 세상에서 종종 외부자였으나 이제 예수와 함께 내부자가 된 이들의 다소 기이한 모임에 기꺼이 참여한다는 의미다.
➃ 하나님 나라는 아직 충만한 모습으로 임하지 않았다라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 신앙은 종말론적이다. 언제나 미래를 향해 몸을 숙이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 마지막 때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5.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➀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지에 대한 선언이다.
➁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 우리가 간구해야 할 것은 ‘인내임’을 말한다.
➂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땅과 하늘에서 하고 계신 일에 대한 비전에 완전히 매료되어 세상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이야기(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며 사는 것이 최고라는 메시지)를 잊게 되는 것이다.
➃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의 삶보다 더 큰 어떤 계획에 사로잡히기를 간청하는 것
천국은 “저기 하늘 위의” 어떤 장소가 아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 하나님의 “성도의 교제”가 일어나는 곳,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고 충만하고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나타나는 곳이면 어디나 천국이다.

6.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➀ 우리의 삶이 양식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라는 것을 말한다.
구원이란 삶이 선물일 뿐 아니라 밥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한다.
➁ 우리가 밥을 먹고 사는 육신을 지닌 존재이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보살피신다는 말
이 기도는 우리에게 밥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침,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기를 기뻐하심
➂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날마다 임하라는 것을 말한다.  
➃ 양식은 공동체적 산물이며, 공동의 책임을 말한다.
나의 양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 이웃의 필요에 대한 우리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7.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➀ 죄를 용서하는 통제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다.
➁ 은혜를 받는 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피조물된 기쁨, 통제권을 넘기고 사는 기쁨을 재발견하도록 돕기 위해 주신 선물이다.
➂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임을 말한다.  
➃ 용서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기독교의 용서는 결코 값싼 용서가 아니다. 우리에게 책임을 떠맡으라고, 세상을 바꾸라고, 끝없이 돌고 도는 보복과 복수의 쳇바퀴를 멈춰 세우라고 초대하고 계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용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➄ 용서하고 용서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에 참여하겠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배우게 되는 것

8.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➀ 하나님은 이 창조세계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십자가는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결코 꺾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➁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라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구원은 입양되는 것이며(세례), 한 백성(이스라엘과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➂ 대적의 공격 대상이 되기를 자처한다는 뜻이다.
“구원하다” “시험” “건지다” 같은 단어들은 모두 위기와 관련된 낱말들이다. 주기도를 기도한다는 것은 곧 우주적 전쟁의 한복판에 던져지겠다는 뜻이다.
➃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거나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징집되지 않았더라면 갖지 않았을 문제들을 우리가 갖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이 권세와 싸움을 벌이는 그 전쟁터에 참여하겠다고 하는 말과 같다.
➄ 우리가 자신의 힘만으로는 악에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항해 싸우는 권세에 굴복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러한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우리에게 어떤 초자연적인 권세의 간섭이 필요하다.
➅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어느 대적보다 하나님이 더 큰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9.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➀ 하나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정의한다.  
주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 가운데 만연한 영광의 개념 자체를 바꾸어준다. 그것은 영광이 피 흘리는 십자가로 정의되는 나라이다.
➁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림의 떡이 아니라 그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음을 말함

10. 아멘
➀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이 진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주기도다
사람들은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이는 지금까지의 내 세상 경험과 잘 맞는다.” 혹은 “그 생각은 기존의 내 생각과 조화를 이룬다. 따라서 현재의 내 실존에 도전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보기에 진리가 맞다.” 이에 대해 하우어워스는 내 경험이 진리가 아닌 하나님의 주기도만이 진리임을 말하고 있다.
➁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를 드릴 때, 우리 삶은 하나님께로 전향된다.
주기도는 공동체 안에서 회중과 함께 하는 기도이며, 기도 할 때 성령 안에서 역동성이 일어난다. 우리의 삶이 전에는 알지 못했던 보다 의미 있는 모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발견한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외친다. “아멘!”

3. 주여 기도를 가쳐주소서 내용 분석

1) 공동체에 대한 강한 초점 이미지 때문에 상대적으로 성경 석의가 약함
   하우어워스의 성경 석의는 그렇게 정확하지 않다. 예를들어 주기도문의 시작을 알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를 말할 때, ‘우리’, 즉 공동체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 보다 ‘아버지’에 더 강조점을 둘 필요가 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아버지를 ‘πατερ’라는 표현을 쓴다. 토마스 윌터 맨슨(T.W.Mandon)이나 요야킴 예레미아스(J. Jeremias)등은 이를 유대교에서 사용되지 않는 “예수의 혁명적 표현”으로 바라보고 있다. 예레미아스는 한 발 더 나아가 이 ‘πατερ’라는 표현에 신약의 기독론이 다 들어가 있다고까지 표현한다. 김세윤은 이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가 되는 것이며 그 분의 모든 부유함을 내가 끌어 쓸 수 있다고 표현한다. 이는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πατερ’로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주었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πατερ’로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주신 것을 뜻한다.
   이런 해석을 하우어워스에게서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 책에서 강조하는 ‘공동체’라는 명확한 초점 이미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외의 석의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해석은 신약 성경의 비전에 거의 부합한다고 평가 할 수 있겠다.

2) 구약에 대한 인용 빈도수가 상당히 적음, 선인들의 전통을 중시
우리 아버지
요15:13-16, 벧전2:10, 갈4:6-7, 마23:9, 롬8:26-27
하늘에 계신
히12:18-19;29, 엡6:12, 히4:14-16, 마6:26, 마7:7-8, 히12:2, 롬8:22-23,
히12:1, 계7:15-17
시8:3;9, 시33:13-14, 시23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출3:6, 계4-5, 마5:43-45, 벧전2:9, 벧전2:11-12  
사55:8, 시150
나라가 임하옵시며
막1:14-15, 마2:3, 마2:13-18, 눅4:5-8. 눅18:18-25. 막1:22;27, 마9:10-12,
마5:3-5, 막4:26-29, 막4:1-9, 눅13:20-21, 행1:11, 마22:2-10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26:39, 고후12:7
창45:4-5;7-8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막6:34-42, 눅24:28-31, 눅6:20-21, 빌4:11-13
출16:1-36, 사55:1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눅11:4, 마6:12, 요일1:8, 롬3:23, 마18:21-33, 골2:13-15
시103:8-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마8:23-25, 엡6:18-20, 엡6:10-13, 롬7:15-20;24, 롬8:31-39, 빌4:4-7,
벧전5:8-9, 롬8:26-27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눅1:46-53, 눅18:18-26, 마4:1-11, 빌2:5-11, 요12:27-29, 요15:8,
요12:31-33, 계21:1-4
아멘
엡1:16-18;20-23, 골4:2-3, 빌1:3-4:6, 계22:20-21

   성경에 대한 사용은 특별히 공관복음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외에 옥중서신과 로마서가 주로 인용되고 있다. 반면에 구약은 신약에 비해 인용비율이 적다. 특별히 공동체와 제자도를 강조하는 그의 논리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의 사용은 의외로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점은 특이하다. 대신 하우어워스는 특별히 선인들(토마스아퀴나스,루터,C.S.루이스,성 아우구스티누스,그레고리우스 등)을 언급하며 그의 주장을 전개해 나간다.

3) 성경석의가 명확하지 않음에도 그의 해석이 불편하지 않은 이유: 기독교 전통에 서 있기 때문
   하우어워스의 성경 석의는 헤이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확하지 않다. 사실 그는 성경 석의의 작업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현실의 문제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아마 하우어워스가 헤이스와 달리 성서학자가 아닌 기독교 윤리학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하우어워스는 “주기도문”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철저히 자신의 초점 이미지인 공동체에 대한 강조가 엿보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성경적 석의가 명확하지 않음에도 기독교 전통에는 그 모든 해석이 거의 정확히 부합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이유는 그가 기독교의 오랜 전통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우어워스가 토마스아퀴나스, 루터, C.S.루이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레고리우스로부터 이어지는 전통을 중시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성경 석의를 기독교 전통에 서 있게 한다.

4) 초점 이미지 및 그 외의 특징들
   하우어워스의 전체 저작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 그의 초점이미지는 ‘십자가’와 ‘여정’이다. 즉, 십자가로의 부름에 따른 철저한 제자도를 통해 기꺼운 순종으로서, 모험의 여정을 즐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때 그것을 풀어가는 방법론으로 하우어워스는 우리에게 공동체, 성품,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주기도문에서는 그 중 공동체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하우어워스의 주기도문에 나타난 특징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온전한 이해를 통한 제자 된 삶으로서의 패러다임 전환을 촉구한다. 또한 전통적인 측면에서는 성만찬과 세례를 강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경험적인 측면에서는 우리의 생각이나 기존의 경험과 맞을 때만 ‘아멘’이라고 고백하는 것의 경험적 폐단을 지적한다. 즉, 참된 ‘진리’는 오직 주기도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이성의 역할에 대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4. 나가는 말 (하우어워스의 이야기 윤리를 덧 붙여서)

   오늘날 현대인들의 삶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질서 속에 경쟁과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의 가치는 소유에 따라 계층화되며 인간의 존엄성은 경쟁 속에 매몰된다. 그래서인지 근래 들어 공동체 의식의 회복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특별히 올해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서적 가운데 하나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그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정의란 시민 의식의 연대와 공동선의 추구를 통해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이클 샌델의 생각은 하우어워스의 의견과 비슷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하우어워스가 강조하는 성품의 윤리와 공동체가 바로 비슷한 맥락 안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우어워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야기 윤리를 주장한다. 성품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우주적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기인한 이야기로 인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 주장하는 정의로부터 구분되어지는 기독교 윤리만의 독특성이다. 그래서 하우어워스는 “기독교적 신념들은 오직 한 분, 진리이신 우주적 하나님을 온전히 신앙하면서 살아가는 공동체를 창조함으로써 자아를 진실한 신앙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우어워스의 윤리 방법론을 적용함에 있어서 현대 기독교 공동체의 상황은 어떠한가. 이 천년 전 초대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삶, 부활, 십자가를 직접 경험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을 넘어선 공동체의 경험으로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이 되어졌다. 이제 인간 예수는 그리스도임과 동시에 진리가 되어졌고 공동체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 위에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이야기적 전통은 갈수록 교리화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우어워스는 틸리히와 불트만이 복음을 현 시대적 상황에 맞게 번역하는 일에만 집중함으로서 복음의 본래적 모습을 훼손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라인홀드 니버는 예수의 윤리를 초월적 이상으로 봄으로써 사회윤리와 정치윤리의 가능성을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즉, 현대 기독교 공동체의 비극은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으로서의 예수가 온전히 전통에 근거하여 이야기 되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
   따라서 하우어워스는 우주적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이야기적 전통을 가진 공동체성의 회복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 윤리가 사회 윤리가 될 수 있고 정치 윤리가 될 수 있는 근거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그 부르심 앞에 철저히 순복함으로써 모험적 여정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하우어워스가 말하듯 우리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대안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 윤리의 회복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실제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창조적 모방의 과정을 통한 하나님 계시 사건의 재현이 여전히 이야기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 때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는 전통에 근거한 이야기적 공동체에 의하여 진행되어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