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혼은 실제로 존재 한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이 실제로 존재 한다’는 생각에 대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계시를 통한 깨달음이든 종교적인 학습을 통해서든 ‘인간이 영·혼·육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개념은 더 이상 이론적 지식이나 관념적인 개념에만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실험을 통해서도 증명이 되고 있다.  
   최근 각 서점에서 종교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책은 이어령씨가 쓴「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이다. 이 책에 보면 영혼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물론 이전에 몰랐던 것은 아니고 개인적인 깨달음이 있어 메모해 두었는데 주제에 관한 설명을 위해 소개하고자 한다.

예전에 멕시코 감독이 만든 영화중에 <21그램>이란 영화가 있었다. 인간 영혼의 무게는 라면 한 젓가락 정도밖에 안 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미국 매세추세스 병원에서는 임종직전의 말기결핵 환자를 3시간 40분 동안 체중의 변화를 관찰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숨을 거두는 순간 그 환자의 몸무게가 21그램 이였다고 한다. 또 최근에도 스웨덴의 룬데 박사팀이 정밀 컴퓨터 제어장치로 그 실험의 진위를 검증해보았더니 임종 시 환자의 체중 변동이 21.26214그램이었다고 한다.(이어령, 지성에서 영성으로 中)

   이러한 실험의 결과는 영혼이 무게를 가진다는 사실과 함께 그 자신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궁금한 것은 이렇게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영혼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느냐는 것이다. 먼저 그의 이론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영혼에 관한 두 가지 핵심

- 영혼과 신체의 비분리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이 ‘질료’와 ‘형상’의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는 모든 자연물들이 형상과 질료로 구성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들이 영혼과 신체의 합성물 또는 복합물이라고 말한다(영혼에 관하여, 123-5). 여기서 우리는 형상=영혼, 질료=신체라는 의미로 각각의 단어의 유사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생명을 잠재적으로 가지는 자연적 신체의 형상’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실체’는 ‘형상’을 지칭하며, ‘형상’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질료’와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형상은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코기토와도 구분되고 물질의 필요 없이 독립적으로 이상세계에 실재한다고 말하는 플라톤과도 구분된다. 이러한 영혼과 신체의 비분리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은 분노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들으면 쉽게 이해되어 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분노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자연철학자와 논리학자는 각각 달리 정의할 것이다. 후자는 그것을 복수하려는 욕구 또는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정의할 것이고), 반면에 전자는 그것을 심장 주변의 피의 끓어오름 또는 뜨거움으로 (정의할 것이다) 이들 가운데 전자는 질료를, 그리고 후자는 형상 또는 형식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분노의) 형식이 바로 그것이며, 그것이 작용하려면, 그것은 반드시 적절한 질료 내부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영혼에 관하여, 75-6) 영혼의 영향 받음들이 최소한 분노와 두려움과 같은 종류인 한에 있어서, 그것들은 생물들의 자연적인 질료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선이나 면과 같이 (사고에서 분리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말했었다.(영혼에 관하여, 77)

   즉,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를 통해 형상(영혼)과 질료(신체)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 영혼(형상)의 우선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영혼(형상)과 신체(질료)의 비분리성을 이야기 하지만 동시에 영혼(형상)의 우선성을 인정한다. 즉, 신체를 가졌다고 해서 영혼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가짐으로써 신체를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주장은 생물이 단순히 물질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물질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갖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해 ‘도끼’의 예를 들면서, 도끼가 도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더 이상 도끼일 수 없듯이, 사람의 눈도 올바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더 이상 눈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영혼에 관하여, 128-130). 이와 마찬가지로, 생물도 생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더 이상 생물일 수 없다.
   결과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의 우선성을 말하는 이유는 생물과 무생물, 즉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죽은 사람도 사람의 신체기관들을 그대로 갖고 있지만, 그 신체기관들은 살아있는 사람의 것처럼 기능하지 못한다. 이런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형상)의 우선성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 칸트와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관 비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영혼에 대한 이론은 영혼과 신체의 관계적인 측면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영혼의 영원성의 관점은 확인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영혼과 신체의 비분리성으로 인해 육체가 죽음에 따라 영혼도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그의 논리는 칸트에 의해 비판당할 소지가 있다.
   칸트는 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영혼에 대한 영원성을 도덕개념과 연결시킨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이 현재의 육체적 죽음과 함께 영혼의 종말을 인정해야 한다면, 대체로 성취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무엇인가를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책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영혼 불멸 신앙을 주장하는 것은 자아가 무목적적이고 질료적인 것에 내 던져질 것이 아니라 도덕적 중요성을 지니고서 나의 육체적 죽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완성을 명백히 해야 할 것을 의지하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게 있어서 영혼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며 행위의 무한한 전진을 제시하는 목표이며, 도덕법칙의 신성성을 나타내는 본질이다. 이러한 영혼 불멸의 개념은 생을 현세에서 끝내지 않고 피안의 세계에까지 연결하려는 욕구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칸트에게 있어 영혼은 도덕법칙의 형이상학적인 근거가 되어진다.  
   이렇게 칸트는 영혼을 도덕 법칙의 개념과 연결시키며 영혼에 대한 불멸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영혼은 어떤 의미일까. 이것을 위해 다음의 자료를 참고했으면 좋겠다.

   영(靈) : spirit(영어) - 루아흐(히브리어) - 프뉴마(헬라어) - 마음 - 의지(意志)
   혼(魂) : soul(영어) - 네페쉬(히브리어) - 프쉬케(헬라어) - 생각 - 지성(知性)
   육(肉) : body(영어) - 바사르(히브리어) - 사르크스(헬라어) - 감각 - 감정(感情) - 욕심
   (출처 : http://cafe.daum.net/STIGMATA/I5a/226)

   기본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영·혼·육의 존재로 살아간다. 이 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짧은 시간 이 생을 살아가지만 우리에게 영·혼·육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그럼으로 이 땅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잠깐이지만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생의 끝에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영생을 바라본다. 이것은 요 3:16에도 나와 있듯 하나님의 약속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요.”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약속을 믿고 주어진 환경에서 의미 있는 오늘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