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대학 “어둔 밤”

어둔 밤이란, 우리의 눈이 가려진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의 영적인 눈과 감정적인 눈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변화된다. 때는 우리가 신앙의 성숙이 필요할 때니, 하나님이 정하시는 때가 된다. 우리의 영혼은 어둔 밤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다만 하나님이 그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상태에 있다.

‘상서로운 야밤중에
날 볼 이 없는 은밀한 속에
빛도 없이 길잡이 없이
나도 아무것 못 보았노라
마음에 속 타는 불빛밖엔’

빛은 밝아서 우리의 내면을 비춘다하면 너무나도 부끄러운 자신의 허물이 다 비추어진다. 이것 또한 주님의 배려와 사랑이 아닐까?

‘한낮 빛보다 더 찬찬히
그 빛이 날 인도했어라
내 가장 아는 그분께서
날 기다리시는 그곳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쪽으로’

영혼이 어둔 밤으로 들어가면 그 때 이 모든 사랑이 바로 잡힌다. 밤이 하느님 사랑으로 다른 사랑을 정화하고 강화하는 동시에 이를 아주 끊어 없애기 때문인데 처음에서는 두 사랑을 다 안 보이게 한다. 어둔 밤을 실제 눈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 상태라고 해보자.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원을 그리며 돌 때 아무리 많이 지내온 곳이라 해도 한 걸음조차 떼기가 두려운 상태가 된다. 하나님이 부르신 어둔 밤에 들어가는 우리가 곧 그러할 것이다. 하나님을 많이 영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입었다고 해도 어둔 밤에 들어간 우리의 심정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것과 같고 내 뜬 눈으로 의지했던 감정의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아 부르짖을 것이다. 이 상태를 저자는 정화적 관상의 밤이라고 부른다. 정화적 관상의 저 밤이 감성의 집에 있는 모든 정과 욕구 중에 걸림이 되는 충동이나 욕념이면 이를 모조리 잠재우고 힘없이 만든다. 어느 새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요해지게 된다.

‘아, 밤이여 길잡이여’

어둠의 공황 속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길잡이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린다. 그런데 왜 저자는 하나님의 빛을 어둠이라고 부르는가. 첫째는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이 볼 수 없이 높아 따라갈 수 없음에 어둠이라 부르고 둘째는 영혼의 더러움과 낮고 낮음을 보이지 않게 고치시기 때문에 어둠이라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둔 밤으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가 올바로 크기 위해서는 어미의 따뜻한 품만이 다가 아니다. 어미가 아이를 품에서 내려놓고 제 발로 걷게 하면 아이는 그만큼 성숙하게 된다. 여기서 캄캄한 어둠 속을 든든하다고 표현한 화자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장님을 이끄시듯 어디로 해서 어디로 가는지 너도 모르는 캄캄한 속을 이끌어주시니 눈과 발을 가지고서 아무리 잘 간다 해도 우리의 가는 길을 가늠하지 못한다.

나의 얕은 믿음으로 나의 길을 알아보려하나 그것은 헛된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이 감성이 무력해지는 어둔 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면 나의 영혼이 성숙된다는 것은 분명하게 깨달았다.